영조대왕의 옹주 태지비
음지마을의 농로는 양지마을로 이어지고 양지마을 길은 5번 국도를 넘어 매바위로 이어진다.
이 음지말 → 양짓말 → 매 바위[매 바위 → 쇳골 → 잿말랭이(잿말량)]로 이어지는 이 소로가 이젠 추억속의 옛길이 되고 그 주변은 단양의 과수단지가 된 죽령사과의 주 산지이다.
주 품종은 부사이며 늦 가을에 수확하여 왕겨 속에 묻어두고 꺼내 먹으면 이듬해 까지 아주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아주 질 좋은 사고이며 과육 깊숙히 박혀있는 속살의 노란 꿀은 먹어본 사람을 다시금 찾게하여 1998년부터는 동남아시아로 수출하는 명품이 되었다.
또한 지리적인 여건으로 늦은 여름에 태풍이 불어와도 본 죽령사과는 높다란 죽령(소백산맥의 연화봉과 도솔봉)이 태풍을 막아주어 태풍 속에서도 단양의 죽령사과만은 무사할 수 있었다.
태지비가 있어 태봉이라 했던가. 태봉 어딘가에 있었을 태지비는 중앙고속도로 공사 구간에 편입되어 있다가 주변 유적 조사시에 발견되어 얼굴을 드러냈고 지금은 중앙고속도로를 피해 태봉 정상의 소나무 아래로 옮겨져 있다.
처음 오는 사람은 태봉을 찾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주민들께 확인하여 봐도 잘 알지 못한다.
주변의 특기사항은 죽령역(중앙선 열차역)에 와서 길을 물어 봄이 좋겠다.
태지비의 크기는 보통 어른 키에 좀 뚱뚱한 사람의 덩치정도이다. 태지비의 전면과 후면의 글귀는 각각 다음의 글귀가 새겨져있다.
전면(前面)
乾隆十九年甲戌五月十九日未時生翁主阿只氏胎室(건륭십구년갑술오월십구일미시생옹주아지씨태실)
후면(後面)
乾隆十九年七月二十五日辰時立(건륭십구년칠월이십오일진시립)
건륭은 중국의 청나라 제6대 왕인 건륭제의 연호이다.
건륭제가 서기1735년에 왕에 등극했으니 건륭19년이라 함은 서기1754년을 가리킨다. 이 해에 영조대왕의 나이는 만 60세가 된다.
영조는 총 6명의 부인에게서 2남7녀의 자식 두었는데, 태지비의 주인공은 7명의 옹주에 한명일 것이다.
영조의 나이가 60세인 것을 감안하면 막내인 화길옹주나 그 위인 화령옹주쯤이 아닐까 싶은데, 현제 더 이상 자세한 것은 알 수가 없다.
공주와 옹주의 차이는 정실의 잉태냐 후실의 잉태냐에 달려있다.
영조의 정실은 아이를 생산하지 못했으므로 7명 모두가 옹주이다. 당시 아이들은 대개 아기라는 뜻의 “아지”로 불렸으므로 고유명사이기보다는 일반 명사의 성격이 짙다.
탄생 년월일을 서기로 환산하면 1754년 음력 5월19일 오후 4시경이며, 비가 세워진 것은 그로부터 두 달 후인 음력 7월 25일 오전 10시경이다.
예전에 양반가에서는 태를 따로 묻었는데 현재 단양에 전해지는 태지 비는 단양 우씨인 “우탁 선생”의 태지비와 영조대왕의 “옹주 태지비”가 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옛날에는 태에도 비석을 세워줄 정도로 무척이나 태를 소중히 여겼던 모양이다.
비의 발견과 함께 발견되지 않은 옥함은 도굴로 말미암아 먼저 세상 빛을 본 것으로 추정된다.
2009년 09월 28일
의정부 집에서
단양의 화통 / 6K2FYL. 신영섭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