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통의 이야기

적성 산성

단양의 화통 2009. 9. 28. 18:18

 


적성 산성(赤城 山城) ; 사적(史蹟) 第265號

 


    位置 ; 忠北 丹陽郡 丹城面 下方里 산 3-1번지 해발 323m.

    指定日字 ; 1979년07월26일

    規模 및 面積 ; 길이 923m 면적 26,816평.

    築城年代 ; 新羅 振興王 때인 서기545 ~ 551년경

 

     대동지지 단양성지조(大東地志 丹陽城地條)에는 고성(古城)북삼리(北三里) 칭(稱) 성산(城山) 주(周) 1,768척 유대정(有大井)

    호서읍지(湖西邑誌) 단양편( 丹陽編)에는 성산성(城山城) 재군북리(在郡北里) 유석축(有石築) 주(周) 1,768척 내유대정 금폐(內有大井 今廢)

    단양군지(丹陽郡誌) 고적편(古蹟編)에는 城재 城山으로 내고(內高) 1.8~3.3m, 상부(上部)두께 0.6~1.4m,의 반월형 石城으로 성벽둘레 923m로 赤城 주변지세를 살펴보면

 

     동(東)은 험준한 竹嶺고개[697M]1,314m의 도솔봉723M의 두악산(소금무지산)이 赤城山城과 연계되어 新羅와는 가장 가까운 竹嶺을 끼고 竹嶺山城쪽에서 흘러내린 물이 竹嶺川을 이루어 雲溪川이되어 赤城山城을 안고 돌아 北上里. 北下里를 지나 南漢江에 흘러 들어가고 있으며

 

    西쪽으로는 1,015m의 錦繡山과 加隱巖城이 우뚝 솟아있어 南漢江을 경계로 남족으로 건너면 上, 中, 下仙岩의 맑은 물이 丹陽川을 이루어 또 다시 南漢江으로 흘러들어 간다.

 

    所伊山 烽燧臺를 南漢江이 안고 돌아 三國時代때 한강수로(漢江水路)장악을 위하여 사력(死力)을 다 하던 때라 丹陽川, 雲溪川, 竹嶺, 南漢江이 赤城山城()을 중심(中心)으로 감싸고 合流되는 곳이라 地形的으로 要衝地임을 입증(立證)해주고 있다.

 

    오대산에서 發源한 東江과 西江물이 旌善, 平昌, 酒泉, 임계에서부터 흘러내려 영월에서 合水되어 端宗大王의 애닲은 사연을 南漢江 물에 싣고서 高句麗의 전초기지(前哨基地)였던 영춘면(永春面)의 온달산성을 휘돌아 흘러 島潭三峯과 新丹陽 市街地를 지나 萬鶴靑峰(만학청봉 ; 상진대교) 밑을 지나고 수양개 舊石器 遺跡地를 지나 赤城山城 아래로 흘러옴으로서 명산대천(名山大川)의 맑은 물이 赤城山城밑에서 모두 合水된다.

 

    또한 물뿐이 아니고 적성산성(赤城山城)을 중심으로 온달山城, 가은암성(加隱巖城), 독락산성(獨樂山城,) 죽령山城, 공문산성(貢文山城)등 많은 山城이 있는 것으로 보아 山城의 총 집합지역으로서 이곳은 新羅가 高句麗를 攻略한 후 新羅의 前哨基地로 사용했음을 地形地勢로 보아 알 수 있다.

 

    해발 323m밖에 되지 않지만 적성산성(赤城山城)은 신라의 령(嶺)인 慶北 榮州쪽에서 오자면 竹嶺을 넘어 南漢江을 도하(渡河)하기 바로 직전의 첫번째 江 언덕이며 城재 山 頂上부분에 축성(築城)함은 地勢에서 보는 바와 같이 地理的으로 천험(天險)하고 戰略的으로 높지 않지만 현(縣)과 가깝고 본 山城에서 南쪽을 보면서 오른쪽은 丹陽川, 왼쪽은 雲溪川, 後面은 南漢江이고 前面은 두악산(소금무지산)과 저멀리 도솔봉이 있어 慶北 榮州와 醴泉으로 進出하게 됨으로 四方을 골고루 偵察 할 수 있는 戰略的 要衝地임에는 틀림없다.

 

     新羅가 서기 158년 3월 竹嶺 길을 개척하고 北方徑路를 개척하여 高句麗를 攻略하고자 본격적인 전초기지를 여기에다 構築한 것으로 본다.

 

     구전(口傳)에 의하면 赤城山城을 중심으로 북쪽은 高句麗가 陣을 치고 남쪽에는 新羅에서 수자리를 살았다고 한다.

 

    또한 城門이 북쪽에는 없었고 남쪽으로만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이 山城은 南漢江을 사이에 두고 高句麗의 南下를 막기 위한 新羅의 石城임에 틀림없다하겠다.

 

    城의 基礎는 별로 人工을 가하지 않고 토석(土石)으로 다지고 외벽(外壁)을 할석(割石)및 자연석으로 축조했고 성벽의 외벽은 높지 않고 인마(人馬)가 상부로 다닐 수 있는 평평한 방식으로 三國中 新羅와 百濟가 흔히 사용했던 築城方法이었다.

 

    城內의 출토(出土) 유물은 삼국시대의 토기조각과 기와조각이 발견되며 고려시대의 토기인 靑瓷片 기와조각이 出土되기도 한다.

 

    丹陽은 小白山脈의 北쪽에 있어 山脈에 의하여 경상문화권(慶尙文化圈)또는 신라문화권(新羅文化圈)과도 격리되었기 때문에 파편중(破片中)에는 무문(無紋)이나 격자문(格子紋)이 시문(施紋)된 곳이 있어 백제토기(百濟土器)와 일맥상통(一脈相通)하는 面이 있다고도 한다.

 

    이것은 단양을 통하여 新羅. 慶尙文化보다는 忠州를 通한 西海岸의 百濟(馬韓)地方과 地理的으로 通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出土된 회색(灰色) 경질토기편(硬質土器片)이 그 根據라고하며 이와 같은 破片이 夫餘地方 百濟文化圈에 出土된 것과 같다는 것으로 볼 때 三國의 文化가 두루 丹陽地方에 定着되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參照

 

加隱巖城 → 단양군 적성면 성곡리와 제천시 금성면 포전리에 소재. 적성산성에서 패배한 고구려군이 신라의 진격군을 차단시키며 대항해 싸우던 산성으로 추정됨.(충주댐 수몰로 인하여 수몰됨)

 

貢文城 → 단양군 대강면 두음리 산 19번지 안뜽골에 소재하며 죽령을 넘은 신라군이 영주와 예천으로 갈라지는 전략적 요충지를 방어하기 위해 죽령을 개통한 후 적성산성과 함께 축조한 것으로 추정됨.

 

獨樂山城 → 단양군 단성면 가산리 산 76번지와 대강면 직티리 산 31번지에 소재하며 신라시대에 쌓은 산성이라 전해진다.

 

竹嶺山城 → 단양군 대강면 용부원리 산19-2번지에 소재하는 고구려 성으로 죽령 고갯길(국도5번선)에서 북쪽 연화봉 능선 150m정도는 6.25사변시 작전상 중기에 의해 밀리어 옛 흔적을 찾을 길 없고 150m 지점에서부터 북편 능선을 따라 작은 인력으로 움직일 수 없는 큰 기단석이 일렬로 줄을 이어 놓여 있으며 돌 위에는 아직도 많은 흙들이 쌓여져서 이것이 토성의 자취임을 쉽게 알 수 있는 고구려의 남하정책 전성기일 때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야전 방위선용의 산악지형을 이용한 급조된 성으로 추정되는 고구려의 토성이다.

 

 

2009년 09월 28일


의정부 집에서

단양의 화통 / 6K2FYL. 신영섭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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