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단양의 가곡면 향산리!
향산리 3층 석탑
사진 늦게 촬영하여 수정본 올려 놓았읍니다.
충북 단양의 가곡면 향산리의 3층 석탑입니다.
늘 제게 가르침만 주시는 어른이신
申 相喆[평산 신가의 상자 철자를 쓰시는 어른이십니다]
아버지께서 향산리 석탑의 기단부를 살펴보시며
다시 또 한번 돌아보시고 계십니다.....
저 산타페 차량이 부모님을 모시고 제가
2010년 05월 07일
주문진 바닷가를 다녀 왔지요!
다리 불편하신 어머님은 차 내에 계시고
저에게!
이것저것 설명하여 주시는 아버지께선 먼저 안내 간판 읽어보신 후에!
묵호자 스님의 사리를 봉안 하였으나
임.란으로 붕괴되고 도굴되어 탑신만 동네 사림들이
다시 주어모아 살려 놓았답니다.
온갖 꽃들이 만개하고 새들이 우짓는 이곳이
신라에 불교를 전파했던 묵호자님의
사리 봉안 했던 절 터였다니!....
세월의 무상함만!
잘 읽어 보시라고 가까이에서 촬영하여
또 한장 올렸답니다....
향산 여울에 가시어 견지 낚시만 하지 마시고
동네분께 위치 확인하시어
단양의 보물 다시 한번
잘 살펴봐 주시옵기를!.
향산리 3층석탑(香山里 三層石塔) ; 보물(寶物) 第405號
위치 ; 충북 단양군 가곡면 향산리 471-1번지
지정일자 ; 1964년09월04일
규모 ; 높이 4.4M * 기단 폭 1.8M
新羅 訥祗王 19년(435년)에 묵호자가 불지득몽한 이곳에 香山寺를 創建했는데 묵호자가 죽은 뒤 弟子들이 塔을 建立하고 그의 舍利를 奉安하였다.
香山寺는 壬辰倭亂때 兵禍로 타 버리고 3層 石塔만 남아 있었다.
이 石塔은 1935년 日帝治下에 있을 때 舍利 盜掘꾼에 의하여 舍利가 없어지고 넘어져 解體된 것을 香山里 住民들이 다시 세웠다.
1972년 南漢江의 汎濫으로 水害가 나서 水沒 移住者를 위한 住宅을 塔 附近에 建築하여 塔이 마을 가운데쯤에 位置하게 되었다.
塔身部는 三重基壇위에 3層 方形石塔으로 新羅石塔의 典型的인 樣式을 그대로 잘 繼承하고 있다.
地面에는 여러帳의 장대석으로 지대석을 삼고 5매의 장대석으로 下臺를 놓은 위에 4매로 된 중대석을 얹었다. 중대석 각면에는 넓은 宇宙와 당주일주가 모각되어 한면을 2구로 區分하였다.
石材結句는 規律性을 보였으며 彫刻 手法도 優雅하다. 新羅石塔 樣式을 따라 大作은 아니지만 단정한 造型을 보여주는 佳作이며 屋身과 屋蓋石이 各各 하나의 돌로 되어있다.
石材의 結合이 잘 짜여져 있고 彫刻 手法이 아름다운 端正한 塔 모양은 더욱 素朴한 느낌을 준다.
香山里는 1914년 永春郡 현내面 香山里였으나 1946년 01월 佳谷面 香山里가 되었다.
朝鮮時代 英祖(1724년 ~ 1776년) 後半期에 發刊된 餘地圖書에 의하면 69호에 남자 173명, 여자 189명으로 총362명이 살았고 현재(1993년 인구조사)는 남자 149명, 여자 153명, 계 302명이 살고 있음을 볼 때 寺刹 規模가 컸으며 마을 역시 큰 마을임을 알 수 있다.
地形的이나 地理的으로 볼 때 山의 形勢가 明堂荊棘이고 큰 水路인 한강을 앞 둔 大 가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參考文獻 ; 1999년 02월 丹陽文化院 發刊 丹陽文化財 總攬
2009년 09월 28일
경기. 의정부 신곡동
신일 1차 아파트에서
단양의 화통 / 6K2FYL. 신영섭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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