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달 산성(溫達 山城) ; 사적(史蹟) 第264號
위치 ; 충북 단양군 영춘면 하리 산 67번지
지정일자 ; 1979년07월26일
신증 동국여지승람(新增 東國與地勝覽)券 第14 忠淸道 永春縣 고적조에는 성산고성(城山古城) 석축주 1,523척, 높이11척, 내유(內有) 1정(井)으로 처음 표기(表記)되었으며,
여지도서(與地圖書)에는 古城 석축주 1,523척, 높이 11척, 內有 1정, 전우온달위고구려여연청수을아조축(傳愚溫達爲高句麗女娟請守乙阿朝築),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고성 남7리 성산남주(城山南周) 1,523 척, 1정(井),
호서읍지(湖西邑誌)에는 성산성재군(城山城在郡) 북3리 유석축주(有石築舟)1,768척, 내유대정금폐(內有大井今廢)로 표기되어 있으나 실측결과 길이는 682M이며 면적은 7,972평이다.
삼국의 영토 확장 경쟁이 치열했던 당시 신라와 고구려의 영토 확장 전초기지로서 고구려 온달장군이 신라의 침입을 방비하기 위하여 쌓았다.
삼국시대부터 한강을 장악한 나라가 한반도의 주인이었으므로 서로가 차지하려고 사력을 다하던 때의 군사적 중요지역이다.
유일한 교통수단(交通手段)인 수로확보(水路確保)로 문물교환(文物交換)을 자국에 유익하게하고 농경문화의 유리한 거점을 확보하기 위한 지역이었다.
군사적 요새지(要塞地)이며 교통의 요로로 4통(通) 5달(達)의 거점 확보로
동(東)은 영월, 평창, 정선, 강릉지방으로
서(西)는 죽령, 점촌,
남(南)은 영주, 순흥,
북(北)은 제천, 원주, 서울로 수로는 서울로 향하는 제일 빠른 길이었다.
삼국중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하지 아니하고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하였다면 우리나라의 국경선은 현 압록강, 두만강이 아닌 거대국 중국의 양자강, 황하강 유역이 우리의 땅이었을 것이며 대륙적(大陸的)인 기질을 가질 수 있고 거대국(巨大國)을 지배할 수 있는 주인정신의 웅대함과 의타하지 아니하고 자립하는 고구려의 민족정신을 함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며 군신의 약속을 지키고자 최후의 순간까지 싸우다 전사함으로서 언행일치(言行一治)를 실천한 투철한 책임감과 군인정신을 발휘하였음을 본받아야할 충성심이며 부하를 사랑하는 하예 정신은 현세대를 사는 우리에게 귀감이다.
바보, 못 생겨도 자기를 수련하고 노력하여 고구려의 명장()이되어 후주의 문제가 요동침공시 배산 들에서 선봉장이 되어 대승하자 평원왕으로부터 사위로 인정받아 대형의 벼슬을 받음으로써 노력하면 모두 다 이룰 수 있다는 무한한 가능성을 일깨워 주었다.
바보 행각을 하면서 홀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부자 집 앞을 문전걸식하면서 좋은 음식만을 들게 한 지극한 효성심 만은 현 사회를 사는 모든 사람의 효()의 사표로 삼아야 하며 도덕성 회복의 사표이다.
바보 온달을 위하여 부귀영화를 버리고 학문과 무예를 가르쳐 국가에 큰 도움을 준 평강공주의 내조의 힘. 내조정신은 모든 여학생 및 전 여성들이 본받아야할 정신이다.
온달산성 주변의 자연부락 명칭이 모두 현실과 일치하는 유래된 지명으로 재미있는 현상을 볼 수 있다.
온달산성을 중심으로 약 4Km이내 82개 자연부락 명칭과 6Km이내의 30개 자연부락 명칭이 그 자체의 명칭을 유래하였다.
4Km이내 82개 자연부락 중 46개 자연부락이 군사적 전술용어로 56%이며, 명칭과 유래된 82개 자연부락 중 80개 부락이 유래된 지명으로 98%에 해당됨을 볼 때 온달산성과 주변 자연부락 명칭은 그냥 무의미하게 명명되었거나 아무렇게나 부른 명칭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전쟁용어 마을명은 온달성, 장군목, 대진목, 방터, 성재고개, 쇄골, 은포동, 말등, 은익이, 면위실, 군관, 망굴여울, 쇠점불이, 표대봉, 비마루, 둔친머리, 쉬는돌, 분산골, 바른골, 피바위골, 통쉬솔, 돌무지골, 안이골, 장방터, 성골 등이 있다.
參考文獻 ; 1992년 02월 丹陽文化院 發刊 丹陽文化財 總攬
2009년 09월 28일
의정부 집에서
단양의 화통 / 6K2FYL. 신영섭 올림.
단양 온달산성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 온달로 23 (영춘면) | |
사적 제264호(1979.07.26 지정) |
* 전설과 역사가 있는 곳, 온달산성 *
충북 단양의 온달산성은 남한강변의 해발 427m의 성산에 축성된 길이 682m[외측], 532m[내측], 높이 6m~ 8m로 축성되어 반월형 석성으로 원형이 잘 보존되고 있으며 사적 제264호로 지정되어 있다.
영춘을 돌아 흐르는 남한강 남안의 산에, 길이 70cm, 너비 40cm, 두께 5cm 크기의 얄팍한 돌로 축성한 석성으로, 약 100m 정도가 붕괴된 것 외에는 대체로 현존한다.
동 ·남 ·북 3문[門]과 수구[水口]가 지금도 남아 있다. 성내에는 우물이 있었다고 전하나 지금은 매몰되어 물이 조금 나올 정도이며, 곳곳에서 삼국시대 및 고려 때의 토기조각을 볼 수 있다.
이곳은 고구려가 삼국통일을 이루었다면 현재 중국의 양자강과 황하강 주변이 우리의 땅이 되었을 것이라는 역사적 회고와 바보 온달이 자기 수련의 노력을 통한 명장으로의 변신과 홀어머니에 대한 효행심 그리고 평강공주의 내조의 힘 등을 통하여 현대의 우리들에게 많은 교훈과 의미를 주는 유서 깊은 곳으로 온달동굴과 더불어 학생들의 고적 답사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 온달산성의 지명과 전설에 대하여 *
온달산성의 지명과 전설에 의하면, 영토확장 경쟁이 치열했던 삼국시대에 한강을 차지하기 위한 전초기지로서 고구려와 신라 사이에 영유권을 둘러싸고 전투가 치열하였던 곳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고구려 평원왕의 사위 바보온달 장군의 무용담과 함께 평강공주와의 사랑이야기가 전해오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고구려 평원왕[平原王]의 사위 온달이 신라군의 침입 때 이 성을 쌓고 싸우다가 전사하였다고 삼국사기 열전 제45에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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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09월 22일
2018년 추석을 이틀 앞두고서
단양의 온달산성의 각기의 자료를 수집하던 중에
한국관광공사와 Daum 백과자료의 단양 온달산성 자료를
Copy하여
여러사람들이 대번에 활용토록
충북 단양의 투구봉 주유소에서
단양의 화통 / 6K2FYL. 신영섭 올림.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의
아름다운 이야기
종목 ; 사적 제264호
명칭 ; 단양 온달산성
분류 ; 유적건조물ㆍ정치 국방ㆍ성ㆍ성곽
지정([등록]일 ; 1979년 07월26일
소재지 ; 충북 단양군 영춘면 하리 산67 시대 삼국시대
죽은 후까지 아내 말만 들은 남자
충북 단양에 있는 온달산성은 고구려 평원왕의 사위 온달장군이 신라군의 침입 때 싸우다가 전사한 성이다. 고려 때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열전]에 온달의 이야기가 나온다.
온달은 얼굴이 험악하고 우스꽝스럽게 생겼지만 마음씨는 밝았다.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항상 밥을 빌어 어머니를 봉양하였으며, 떨어진 옷과 신발을 걸치고 다녔기에 당시 사람들 이 그를 ‘바보 온달’이라고 불렀다.
한편 평원왕에게는 울보 평강공주가 있었는데 왕은 어 린 공주가 울 때마다 농담으로 이렇게 달래곤 했다. “네가 항상 울어서 내 귀를 시끄럽게 하니, 커서 틀림없이 사대부[士大夫]의 아내가 못되 고 ‘바보 온달’에게 시집을 가야 되겠다.” 세월이 흘러 공주가 16세가 되자 왕은 딸을 상부[上部]고씨에게 시집보내려 했다. 그러나 공주가 말했다. “대왕(大王)께서 항상 말씀하시기를 너는 반드시 온달의 아내가 되리라 하셨는데, 오늘은 무슨 까닭으로 전일의 말씀을 바꾸십니까?
필부[匹夫]도 거짓말을 하려 하지 않는데 하물며 지존[至尊]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임금은 농담을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대왕의 명령이 잘못되었으므로 소녀는 감히 받들지 못하겠읍니다” 끝내 공주가 말을 듣지 않자 왕은 화가 나서 공주를 궁에서 내쫓았다. 공주는 보물 팔찌 수십 개를 팔꿈치에 걸고 궁궐을 나와 혼자 길을 떠났고 행인에게 바보 온달의 집을 물어 그의 집까지 찾아갔다. 그리고 눈먼 노모에게 절을 하며 아들이 있는 곳을 물었다. 늙은 어머니가 대답하였다. “내 아들은 가난하고 보잘 것이 없으니, 귀인[貴人]이 가까이 할 만한 사람이 못 됩니다. 지금 그대의 냄새를 맡으니 향기가 보통이 아니고, 그대의 손을 만지니 부드럽기가 솜과 같으니, 필시 천하의 귀인인 듯합니다. 누구의 속임수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소? 내 자식은 굶주림을 참다 못하여 느릅나무 껍질을 벗기려고 산 속으로 간 지 오래인데 아직 돌아오 지 않았소.”
공주가 그 집을 나와 산 밑에 이르렀을 때, 온달이 느릅나무 껍질을 지고 들어왔다. 공주가 그에게 다가가 자기의 생각을 이야기하니 온달이 불끈 화를 내며 말했다. “이는 어린 여자가 취할 행동이 아니니 필시 사람이 아니라 여우나 귀신일 것이다. 나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 온달은 그만 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렸다. 공주는 혼자 돌아와 사립문 밖에서 자고 이튿날 아침에 다시 들어가서 모자[母子]에게 자세한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온달이 우물쭈물하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데 그의 어머니가 말했다. “내 자식은 비루하여 귀인의 짝이 될 수 없고, 내 집은 몹시 가난하여 정말로 귀인이 거처할 수 없읍니다.” 공주가 대답하였다. “옛 사람의 말에 ‘한 말의 곡식도 방아를 찧을 수 있고, 한 자의 베도 꿰맬 수 있다’ 고 하였 으니 만일 마음만 맞는다면 어찌 꼭 부귀해야만 같이 살겠읍니까?” 말을 마치고 공주가 금팔찌를 팔아서 전지[田地], 주택, 노비, 우마, 기물[器物]등을 사 들이니 살림 용품이 모두 구비되었다. 처음 말[馬]을 살 때 공주가 온달에게 당부했다. “부디 시장의 말을 사지 말고 나라에서 쓸모가 없다고 판단하여 백성에게 파는 말을 선택 하되, 병들고 수척한 말을 골라 사오세요.” 온달은 아내의 말을 그대로 따랐고 공주는 부지런히 말을 길렀다. 말은 날로 살찌고 건장 해졌다.
고구려에서는 언제나 봄 3월 3일을 기하여 낙랑[樂浪]언덕에 모여서 사냥하여 잡은 돼지 와 사슴으로 하늘과 산천의 신령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 날이 되어 왕이 사냥을 나가는데 여러 신하와 5부[五部]의 군사들이 모두 수행하였다. 이 때 온달도 자기가 기르던 말을 타고 수행하였는데, 그는 항상 앞장서서 달리고, 또한 포획한 짐승도 많아서 다른 사람이 그를 따를 수 없었다.
왕이 불러서 이름을 듣고 놀라며 기이하게 여겼다. 곧이어 온달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후주의 무제가 군사를 출동시켜 요동을 공격하자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배산 들에서 맞아 싸웠다. 그 때 온달이 선봉장이 되어 용감하게 싸워 수 십여 명의 목을 베니, 여러 군사들이 이 기세를 타고 공격하여 대승하였다. 공을 논할 때 온달을 제일이라고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왕이 그를 가상히 여기어 감탄하며 말했다. “이 사람은 나의 사위다!” 그제야 왕은 예를 갖추어 그를 영접하고 그에게 작위[爵位]를 주어 대형[大兄]으로 삼았다. 이로부터 그에 대한 왕의 은총이 더욱 두터워졌으며, 위풍과 권세가 날로 성하여졌다.
양강왕이 즉위하자 온달이 아뢰었다. “지금 신라가 우리의 한북[漢北]지역을 차지하여 자기들의 군현으로 만들었으므로, 그곳의 백성들이 통탄하며 부모의 나라를 잊은 적이 없읍니다. 바라옵건대 대왕께서 저를 어리석고 불초하다고 여기지 마시고 군사를 주신다면 단번에 우리 땅을 도로 찾겠읍니다.” 왕이 이를 허락하자 그는 길을 떠날 때 맹세하였다.
“계립현과 죽령 서쪽의 땅을 우리에게 귀속시키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읍니다!” 그는 드디어 진격하여 아단성 밑에서 신라군과 싸우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전사하고 말았다. 그를 장사지내려 하였으나 영구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뒤늦게 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며 슬픈 목소리로 이렇게 속삭였다. “사생(死生)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아아! 이제 그만 돌아가소서!” 그제야 영구가 움직여 하관할 수 있었다. 대왕이 이 소식을 듣고 더욱 비통하게 여겼다.
바보 온달의 전설이 있는 곳,
온달산성은 영토 확장 경쟁이 치열했던 삼국시대에 한강을 차지하기 위하여 고구려와 신라가 치열한 전투를 했던 곳으로 고구려 평원왕의 사위 온달 장군의 무용담과 함께 평강 공주와의 사랑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온달산성은 길이 972m, 높이 3m의 반월형 석성으로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성 안에는 삼국시대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우물터가 남아 있고, 성벽 바깥부분에는 사다리 꼴 모양의 배수구가 있다. 남서쪽 문터의 형식과 동문의 돌출부는 우리나라 고대 성곽에서 드물게 보이는 양식으로 주목할 만하다. 성의 북동쪽 남한강변 절벽 아래에는 온달굴이라는 석회암 동굴이 있고, 성을 바라보는 북쪽 강 건너의 산에도 온달과 관계되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성벽의 보존 상태가 좋아 축성법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유적이다.
또한 온달산성 주변에는 일부에서 온달의 무덤으로 주장하는 단양 사지원리 방단적석유구와 전쟁과 관련된 수많은 지명이 남아 있다. 그리고 인근 지역인 충주 미륵사지에는 온달이 가지고 놀았다는 공기 돌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어 관련 연구가 필요하다. 온달의 공기 돌은 거북바위라 하는 큰 바위 위에 있는 지름 1m 가량의 바위를 말한다. 온달장군이 신라군과 싸우기 위하여 이 지역에 주둔하고 있을 때 군사들 앞에서 힘자랑을 하기 위하여 둥근 돌을 공기 돌처럼 갖고 놀았다고 하여 온달의 공기돌이라고 불렸다. 또한 미륵리에는 온달장군의 말이 죽어 묻혔다는 말 무덤이 남아 있다. 지금 온달산성 아래에는 온달 동굴과 더불어 온달관광지가 조성되어 있으며 단양에서는 바보 온달과 평강 공주를 기리기 위해 온달문화 축제를 매년 10월에 개최하고 있다.
2018년 05월 19일
충북 단양의 투구봉 주유소에서
단양의 화통 / 6K2FYL. 신영섭
Google의
"충청권 문화유산과 그 삶의 이야기" 를
P487부터 P492까지 복사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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