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통의 이야기

단양 적성비

단양의 화통 2009. 9. 28. 17:54

 

충북 단양의 적성비 모습!.

 

비각 내에 고이 모셔져 있답니다....

글씨 잘 보이지 아니하나 그 내용은?

살짝 아래 올려져 있는 내용들입니다.

 

 

 

단양 적성비(丹陽 赤城碑) ; 국보(國寶) 第198號

 

위치 ; 충북 단양군 단성면 하방리 산 31-1번지 (중앙고속도로 上鄕 단양 휴게소 담장 밖)

지정일자 ; 1979년05월22일

규모 ; 높이 930mm. × 상폭 1,000mm. × 하폭 530mm

 

    石質은 자연석(自然石) 화강암으로 편편한 면에 얕게 음각(陰刻)했으며 개석과 대석은 없는 쑥돌로 사면은 없어지고 마모되어 수습하지 못했다.

 

    글씨는 15mm ~ 30mm의 직경으로 가로, 세로 줄을 맞추어 예서풍(隸書風)의 해서체로 본래 고구려 땅인 赤城碑(단양의 옛 지명)의 지명이 3번씩이나 적혀있다. 碑文의 문장은 크게 4등분으로 구분된다.

 

    첫째는 OO년 O월 중 왕교사(王敎事)라 한 부분의 振興王에 관한 교시(敎示)에 관한 문장이고,

    둘째는 新羅의 機關과 官職에 관한 문장으로 이사부(伊史夫), 대상등(大象等), 하간지(下干支)등의 관직이며,

    셋째는 振興王 당시 신라(新羅)의 행정제도(行政制度)및 율령(律令)에 관한 사회제도(社會制度)이며

    넷째는 평정(平定) 한 지역주민의 선무활동(宣撫活動)으로 영토(領土)의 주민통치(住民通治)를 위하여 懷柔하며 恩寵을 베푼 내용이다.

 

    신라(新羅) 진흥왕(振興王)때에는 振興王이 국경(國境)을 순행(巡行)하게 된다. 즉 振興王 16년(551년)10월 王이 직접 北漢山을 巡行하며 척경(拓境)을 하고 11월 왕성(王城)으로 돌아오면서 주군현(州郡縣)에 교(敎)하여 1년간의 토지세(土地稅)와 지역특산물(地域特産物)에 대한 稅金을 免除해 주고 罪人을 赦免하여 주었다.

    이 때에 단양지방 부근을 순시(巡視)하면서 건립한 碑라고 學者들은 주장하고 있다.

    이 碑의 人名을 살펴보면 이사부(異斯夫), 비차부(比次夫), 등은 당시 新羅의 國防部 長官에 해당되는 官職이며, 무력(武力)은 김유신의 조부(祖父)로서 군주였으며, 比次夫 역시 군주로 북진정책(北進政策) 수행에 적극 참여한 인물이며, 고두림(高頭林)이란 高句麗人의 등장과 당주(幢主), 도설지(導設智), 조흑부(助黑夫)가 관심있는 인물이며, 새로운 관직으로 등장한 大象等, 下干支는 여태까지 나타나지 아니한 官職名이라서 硏究對象이며 學界의 관심거리이다.

 

     이 비의 관심사는, 신라의 율령제도(律令制度)에 관한 장적(帳籍)을 기록하여, 호적(戶籍)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고, 대인(大人), 소인(小人), 남자(男子), 여자(女子), 노인(老人)등으로 구분한 것은, 學界의 큰 수확 이라고 한다.

 

    日本에서는 우리나라가 新羅 景德王 이전에는 戶籍이 없다고 하였으나, 이번 碑文의 판독으로 호적제도가 시행되었음을, 문헌으로 밝힌 것이 된다.

 

    현 주거민(住居民)에게는 적성의 地域人으로서 新羅의 拓境을 돕고 충성한 赤城人 야니차(也泥次)의 공훈을 표창하고 앞으로 也泥次와 같이 新羅에 忠誠을 바치는 사람에게는 똑같이 표창(表彰)을 하겠다는 왕의 약속이기도하며 새로이 개척한 땅, 점령한 땅에 대한 民心을 안정시키고 赤城住民을 칭송한 碑文이다.

 

    이 裨는 振興王이 이곳에 왔다는 기록이 없어 巡狩碑는 아니고 新羅가 高句麗 땅을 빼앗은 전승기념비(戰勝記念碑)라는 의견도 있으며, 창녕의 振興王 巡狩碑보다 10년 전에 만든 國內 最古의 금석문(金石文)이라고 한다.

 

 

參考文獻 ; 1992년 02월 丹陽文化院 發刊 丹陽文化財 總攬

사진의 출처는 원주의 "우리산마을"[다음Cafe]에서 복사하여 왔음을 밝혀둡니다.

 

 

2010년 05월17일

 

의정부 집에서

단양의 화통 / 6K2FYL. 신영섭 올림.

신 영섭 올림.

 

 

 

鍊丹調陽[연단조양]

숨결을 찾아서..........

 

 

鍊丹은 신선이 먹는 환약을 뜻하고,

調陽은 빛을 골고루 따뜻하게 비춘다는 의미로

 

신선이 다스리는 살기좋은 고장이라는 뜻이며 단양 지명의 유래다.

 

赤城碑

신라가 죽령을 넘어 고구려 영토인 적성을 점령한 후에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세워놓은 것이다.

1978년 01월06일 단국대학교 학술 조사단에 의하여 발끝에 채여 넘어진 학생이

무엇이 나를 넘궈트렸나 하며 살펴 보던 중에 발견한 우연의 일치치고는 대단한 성과였다.

 

발견 당시 땅속에 300mm정도가 묻혀 있었다.

 

비의 모습은 위가 넓고 두꺼우며, 아래가 좁고 얇다.

윗 부분은 잘려나가고 없지만

양 측면이 거의 원형으로 남아있고

자연석을 이용한 듯 모양이 자유롭다.

 

글자 수는 440자 정도로 추정되는데,

지금 남아있는 글자는 288자로 거의 판독이 가능하다.

 

글씨는 각 행마다 가로줄과 세로줄을 잘 맞추고 있으며 隸書[예서]에서 楷書[해서]

옮겨가는 필법을 보여주고 있다.

 

비문의 내용은 신라의 영토 확장을 돕고 충성을 바친, 적성사람 也泥次[야니차]의 공훈을

표창하고 있으며, 또한 장차 신라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에게도 똑같은포상을 내리겠다는

국가 정책의 포고 내용이 담겨있다.

 

이러한 비문의 내용은 신라의 형벌 및 행정에 관한 율령제도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즉 노역체제, 재산 분배에 관한 국법이 진흥왕 초반에 마련된 것과

적성지방에 국한된 관습을 법으로 일반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비문의 첫 머리에는 10명의 고관 이름이 나오고 있는데

異斯夫[이사부], 比次夫[비차부], 武力[무력] 등의 官等[관등]명을 

삼국사기의 내용과 살펴볼 때,

비의 건립이 진흥왕 6~11년[545~550]사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북방 공략의 전략적 요충지인 적성지역에 이 비를 세운 것은 새 영토에 대한 확인과 함께

새로 복속된 고구려인들을 흡수하려는 국가의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비록 巡狩碑[순수비 ; 왕이 직접  순행하며 민정을 살핀 기념으로 세우는 비]는 아니지만,

巡狩碑의 정신을 담고있는 拓境碑[척경비 ; 영토 편입을 기념하여 세운 비]라는 점에서

큰 가치를 지닌다.

 

赤城碑 본문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A. 제1행 처음부터 제6행 及干支[급간지]까지의 왕교사 부분.

B. 제6행 절교사에서 제 15행 合五人之까지의 절교사 부분.    

C. 제 15행 별교에서 제 18행 상반부까지의 별교 부분.          

D. 18행 상반부에서 끝 까지의 立碑關명의 나열부분.  

  

A] 왕교사 부분은 왕의 명령을 받아 적성 공략에 참여한 장군들의 이름이 나열된 것이고.

B] 절교사 부분에는 也泥次[야니차]를 비롯한 적성 공략에 공을 세운 지방인들의 공적과

그 가족에 대한 恩典[은전]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고

C]의 別敎[별교]에는 이러한 은전의 수요는 신라의 다른지역 특히 새로 확대된 신라령에도 적용될 것임을 천명한 것이고.

D]에는 立碑[입비]에 관계한 사람들이 나열되어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A . B의 부분을 하나로 보아 전체를 세 단락으로 구분하는 견해도 있고,

형식적인 면에 치중하여 비문 전체를 처음의 년월을 기록한 부분과 본문, 그리고 立碑

관계자를 기록한 부분의 셋으로 나누고 본문 부문을 다시 왕교사. 절교사.  별교의

세 부분으로 나누기도 한다.

 

武田辛男[무전신남]은 비문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A.B.C의 부분을 왕교관계 부분,

D를 立碑關係者 歷名部分[입비관계자 역명부분]으로 구분하고 왕교관계 부분을 다시 셋으로 구분하여 A부분을  受敎高官[수교고관] B부분을 적성 경영의 실제,  C부분을  적성방식의 선포라고 명명하고 있으며, 朱浦槨[주포곽]도 비슷한 시각에서 왕교사. 절교사.  별교의

각 부분은 과거→현제→미래의 시간적 바탕에서 서술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참고문헌]

이우태. 1992. 단양 신라 적성비 건립의 배경.

泰東古典硏究 Vol. 8

 

2015년 02월 24일

설 쇠고 나서

꿈과 희망이 있는 살기좋은 단양소식

2015년 2월호

제일 뒷장을

경기. 포천 송우리에서

단양의 화통 / 6K2FYL. 신영섭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