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통의 이야기

[스크랩] 목은문고(牧隱文藁) 제20권 박씨전(朴氏傳) 박윤문(朴允文))

단양의 화통 2011. 2. 8. 15:24

쾌헌(快軒 김태현(金台鉉)) 김 문정공(金文正公)은 문장과 도덕을 한 몸에 지니고 충렬왕(忠烈王)과 충선왕(忠宣王)과 충숙왕(忠肅王)을 차례로 섬겼다. 그리하여 국가의 의혹이 있을 때마다 마치 시귀(蓍龜)처럼 명쾌하게 결단을 내리면서, 임금의 교화(敎化)가 바르게 펴지도록 보좌하여 국가를 떠받치는 주석(柱石)이 되었다. 그리고 가정에서도 더욱 엄하게 교육을 시킨 결과 여러 자제들이 등과(登科)하였는데, 백씨(伯氏 김광식(金光軾))는 불행히도 일찍 죽었으나 중씨(仲氏)인 둔헌(鈍軒 김광철(金光轍))과 숙씨(叔氏)인 송당(松堂 김광재(金光載))이 모두 재상의 지위에 올라 가문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한편 쾌헌의 사위로는 안씨(安氏 안목(安牧))와 박씨(朴氏 박윤문(朴允文))가 있는데, 안씨는 정당문학(政堂文學)이요 박씨는 밀직 대언(密直代言)으로서 모두 문과(文科)를 통해 현달하였으며, 안씨의 손자 셋과 박씨의 아들 셋이 또 모두 등과(登科)하여 현재 사(士)의 관직에 몸담고 있다. 그런데 이름이 소양(少陽)이고 자(字)가 중강(仲剛)인 자가 있으니, 박씨의 아들이다. 차서로 보면 그가 셋째 아들이 되는데, 비록 성균시(成均試)에는 입격하였지만 대과(大科)에는 누차 응시했어도 급제를 하지 못하였다. 이에 내가 그를 슬프게 여긴 나머지 여기에 그의 일을 기록하게 되었다.
중강(仲剛)은 성품이 고결하여 장구(章句)의 학문 따위는 아예 좋아하질 않았다. 그리고 자신은 평소에 책을 읽지도 않고 과거 공부를 하지도 않았으나, 그렇다고 해서 이미 급제한 사람들을 대하는 것을 보면 그다지 탐탁하게 여기지도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가 열릴 때면 시험장에 으레 들어가긴 하면서도 지필(紙筆)과 등촉(燈燭)만을 가지고 갈 뿐 책은 한 권도 지니질 않았다. 그러고는 담소(談笑)하는 사이에 글 한 편을 짓고 나면 잘 됐는지 못 됐는지 따져 보지도 않고서 그냥 던져 버리고 나오곤 하였으므로 끝내 급제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가 일찍이 혼자 생각하기를 ‘대장부가 답답하게 한쪽 구석에만 처박혀 있다면 우물 속의 개구리와 뭐가 다르겠는가.’ 하고는, 길을 떠나 서쪽으로 경사(京師)에 유람하러 갔다. 그리하여 산천과 인물, 궁궐과 성읍을 실컷 구경하고 나서는 옛날과 달리 안목이 한층 넓어지고 기상이 호탕하게 트인 가운데 평소의 소망을 어느 정도 채울 수 있게 되었다. 이때 서하(西夏) 간극장(幹克莊)의 치서공(治書公)이 그를 한 번 보고는 사랑한 나머지, 자기 집에다 숙소를 정해 주고 후하게 대접하면서 때때로 시서(詩書)를 가르쳐 주기도 하였으나, 중강은 또 이런 데에 마음을 두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중강이 오래 머물러 있다 보니 북방의 언어를 곧잘 구사하게 되었으므로, 밖에 나가서 행인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중강이 우리 동방의 사람이라는 것을 행인들도 알지 못할 정도였다. 이에 중강 스스로 꽤나 기뻐하면서 벼슬을 해 볼 뜻을 가지기도 하였으나, 이를 주선해 줄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마침 인친(姻親) 가운데 산남 염방사(山南廉訪司)의 지사(知事)를 맡은 이가 있었으므로 중강이 그를 따라 노닐게 되었는데, 산남(山南)이 그 관아의 주차(奏差)로 임명해 주었으므로 그가 일찍이 첩서(捷書)를 지니고서 경사(京師)에 한 번 온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해에 마침 내가 또 외람되게 회시(會試)에 급제하였으므로, 여관방에서 그를 만나 며칠 동안 허물없이 유쾌하게 지내다가 헤어졌는데, 그 뒤로는 다시 그를 보지 못하게 되었다.
아, 중강이 지금 살았는지 죽었는지 도대체 알 길이 없다. 우리나라 사신이 해마다 건강(建康 남경(南京))에 들어가서 조근(朝覲)을 하곤 하는데, 그에 대한 소식을 들려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어쩌면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데다가 경사(京師)에는 친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인가? 아니면 일반 백성들 사이에 뒤섞여서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되었기 때문에 본국 사람들을 보는 것이 부끄러워 나타나지 않는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이미 세상을 떠나 다시는 일어날 수 없는 몸이 되었기 때문에 그런 것인가? 그렇지 않고서야 이미 8, 9년의 세월이 지나고 사신들의 왕래가 또 한두 번이 아닌데 이처럼 그에 대한 소식을 들을 수가 없단 말인가.
나는 중강과 죽마고우(竹馬故友)도 아니고 그저 경사(京師)에서 그의 얼굴을 한 번 보았을 뿐이다. 그러나 송정(松亭) 선생이 바로 나의 좌주(座主)이고 보면, 좌주의 생질(甥姪)인 그와 범범하게 사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 때문에 내가 친근감을 표시하면서 같이 밥을 먹자고 하면 중강도 감히 배불리 먹지 않을 수가 없었고, 내가 같이 옷을 입자고 하면 중강도 감히 그 옷을 걸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중강을 종잡을 수 없는 기인으로 여겼지만 나는 그를 근후(謹厚)하게 대우하였고, 사람들은 중강을 방탕한 인물로 여겼지만 나는 법도에 입각해서 그에게 충고를 해 주곤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중강도 나에 대해서는 감히 보통 사람을 대하듯 범범하게 사귀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쾌헌공의 자손들로 말하면 그야말로 한 시대에 성황을 이루었다고 말할 만하다. 그런데 중강만은 중원(中原)에서 노닐면서 끝내 돌아오지 않고 있으니, 중강의 사람됨이 어떠한지 후세 사람들이 장차 알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중강이란 존재는 자취도 없이 사라져서 전해지지 않게 될 것인데, 하물며 자식도 없는데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내가 이 점을 특히 애달프게 여긴 나머지 대략적인 내용을 간추려 써 놓고는, 뒷날 중강에 대해서 알려 줄 자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중강이 만약 중원에서 공을 세워서 사씨(史氏)가 “고려(高麗) 출신으로 성은 박씨요, 부친은 모(某)이며 모친은 모씨(某氏)이다.”라는 기록 등을 역사책에 남기게 된다면, 나의 이 전기(傳記)는 전해지지 않아도 무방하겠지만, 혹시라도 그렇게 되지 못할 경우에는 박씨의 자손들이 가보(家譜)를 만들 적에 나의 이 기록을 참고할 수도 있을 것이다.

출처 : cq쟁이
글쓴이 : 梅谷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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