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통의 이야기

十勝地[십승지]의 壹勝地

단양의 화통 2019. 12. 2. 21:25


十勝地[십승지]의 壹勝地

조용헌의 周遊天下[142]                 농민신문 2019년 11월 25일 월요일 18면 우측상단


얘부터 국가보호 못 받은 백성들 각종 난리 통 땐 각자 살길 도모

各自圖生[각자도생]방법 쓰인 ‘풍수도참서’ 숨기 좋은 10군데 피난 터 나와

풍기, 이북서 침입 피해 많이 이주 충청도 공주로 내려와 살기도


     우리나라는 고려시대 이래로 국가가 백성을 제대로 보호해준 적이 없다.  삼국시대는 어떤지 모르겠는데, 고려시대 이래로 각종 난리가 났을 때 백성들은 각자가 알아서 살길을 도모해야만 했다.

     各自圖生[각자도생]이 전통으로 내려오고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치른 후에 各自圖生의 경험이 축적돼 나타난 秘訣書[비결서]가 바로〈정감록〉류의 風水圖讖書[풍수도참서]다.

     풍수도참을 내용으로 하는 비결서의 하이라이트가 十勝地[십승지]개념이다. ‘10군데의 아주 좋은 피난터’ 라는 뜻이다.  난리가 났을 때 우선 숨어 있을 수 있고, 숨어 있으면서도 기본적으로 먹고살 수 있는 논밭이 좀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갖춘 곳이다.

     十勝地[십승지]는 대개 오지에 해당한다.  산골짜기 깊숙한 곳이면서도  외부인이 쉽게 접근하거나 알아볼 수 없는 지역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러한 십승지는 조선 중기에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그 이전부터 축적돼 왔던 ‘임상경험’을 정리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고려와 조선의 민초들이 난리 통에 살길을 찾아 전국을 헤맨끝에 도달한 결론이 아닐까.

혹은 전국의 이산 저산과 골짜기를 돌아다닌 유랑 지식인 또는 도사들의 노하우가 구전으로 전승돼오다가〈정감록〉같은 비결서로 정리된 것이라는 생각이든다.


     그 十勝地[십승지]의 제일 첫번째로 꼽히는 곳이 경북 풍기의 金鷄抱卵[금계포란]이다. 豊基는 소백산 자락에 위치해 있다.  조금 넓게 말한다면 洋白之間[양백지간]에 자리잡고 있다고 봐야 한다.  즉 太白山小白山 사이에 있다는 말이다.  예부터 한반도의 洋白之間[양백지간]은 난리 통에 가장 안전하게 숨어 살 수 있는 勝地[승지]로 꼽혀왔다.


     조선시대 도사로 이름났던 남사고는 이 洋白之間[양백지간]을 가리켜 可活萬人之地’[가활만인지지]라고 평가한 바 있다.   즉, 만인을 살리는 터’ 라는 것이다.


     太白山 줄기는 동해로부터 왜구가 공격해 오는 루트를 막아주고,  小白山은 북쪽에서 내려오는 적군을 침입을 막아주는 지형이다.  그러면서도 小白山肉山[육산]이다.             

小白山丹陽[단양]쪽은 바위 암벽으로 돼 있어서 식물과 약초가 자라기 어려운 지형이라면 豊基 쪽은 흙으로 덮혀 있는 肉山[육산]이다.  먹을 것이 자랄 수 있는 토양이라는 말이다.  그야말로 풍요[]로는 터[基]이다.  더군다나 豊基쪽에서 보면  소백산이 서북방을 가로 막아주고 있다.  겨울에는 서북쪽에서 殺風[살풍]이 분다.  이 방향을 막아주면 겨울에도 좀 따듯하지 않겠는가.   터를 볼 때도 서북쪽이 터져있거나 약하면 외부 도적이 그 터의 재물을 뺏어간다고 보는데, 豊基 는 1,000M가 넘는 小白山이 아주 튼실하게 서북방을 방비해주고 있는 셈이다.


     豊基[풍기]에 있다는 金鷄抱卵[금계포란]의 명당을 믿고 이북 사람들이 이쪽으로 많이 이주해 왔다. 이북은 북쪽으로부터 몽고. 거란. 여진족의 침입을 쉽게 받을 수  있는 위치이므로 이북 사람들은 난리 났을 때 피난지에 대해 이남 사람보다 더 민감했다. 그래서〈정감록을 이남 사람들 보다 더 좋아했다. 

     황해도, 평안도 사람들 중에는 각종 비결서와 〈정감록〉신봉자들이 많다.


     이들 이북 사람들은 조선조 말기인 1890년대에 민심이 흉흉하고 동학이 일어나니까 집 팔고 논 팔아서 풍기로 이주했다.

     요즘 개념으로 보면 거의 이민 수준이었다.  약속의 땅 가나안 이 바로 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풍기였던 것이다.

     이들이 豊基[풍기]로 이주해올 때는 집집마다 정감록격암유록을 비롯한 수십종류의 비결서들을 지니고 왔다.  이들을 후대 사람들은 비결파라고 부른다.


     두번째 이주는 1930년대 무렵이었다.  세번째 이주는 해방 이후에서 6.25 동란 무렵이었다.  비결파가 이남으로 내려올 때 가지고 왔던 것은 비결서뿐만 아니라 먹고살 수 생활 수단이었다.   그게 직물과 인삼이었다.  객지에 가서 뭘 먹고 산단 말인가.  풍기의 인견과 인삼은 이북 사람들이 개척한 생계수단이었다. 


      풍기에 왔던 일부 인사들은 남서쪽으로 더 내려갔다. 

     충청도 維鳩[유구 ; 현 공주시 유구읍]쪽이다.  維鳩도 산세가 빽빽해서 양의 내장같이 구불구불 깊숙한 느낌을 주는 곳이다.

     유구에서 마곡사까지의 구간을 維摩之間[유마지간]이라고 하는데, 여기에도 이북 비결파 사람들이 많이 내려왔다.  거기서 그들은 직물업을 시작했다.


     10.26의 총격전 상황에서도 살아남은 박정희 대통령 각하의 비서실장 김계원[1923~2016]이 양백지간으로 내려왔던 이북 비결파의 후손이다.  집 터가 명당을 써서 당시에 살아남지 않았을까?



2019년 12월 02일


충북 단양의 장촌말 집에서

단양의 화통 / 6K2FYL. 신영섭은


농민신문 2019년 11월 25일 월요일 18면의

조용헌의 주유천하[142호]를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