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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근곡.

단양의 화통 2013. 5. 28. 20:20

 

여근곡

 

 

 

 

 

 

 

 

 

 

 

 

 

 

 

 

 

 

 

 

 

 

 

 

 

 

 

 

 

 

 

 

 

                                                                                                   

                                                                                                  2005년 늦가을에 촬영한 여근곡 이미지 입니다.

                                                                                                  사진 출처 ; SXQ Ant. Site에서.

 

 

 

 

여근곡의 유래.

 

 

 

 

설화에 얽힌 유래


     오봉산 중간 산허리를 뻗은 능선은 동쪽 앞산을 향해서 유순히 내려 뻗었는데 사람들은 썹들이라고 부르지만 어떤 괴짜스러운 사람들은 -씹들-이라 부른다.

 

발음이 비슷한데다 동내 뒷산이 여근곡(女根谷)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마을에 바람난 처녀가 많다는 우스게 말도 있다.

 

음기가 새기 때문에 견디지 못하고, 밖으로 나간다는 속설이다.

 

이 신평리 마을에 경부고속도로가 생겨서 오봉산 산허리를 달랑 잘라 놓은듯 별로 좋은 관경은 아니다.

      이 씹들 마을 뒷산을 신라때부터 흡사 여자 성기의 골짜기 같다고 해서 일찍부터 이 골짜기 마을을 두고 여근곡이라고 불렀다.

 

   서면들과 건천읍을 지나가는 철길과 일반국도, 지금은 고속도로까지 이 앞을 달려 가고 있지만 차창으로 서쪽 산을 쳐다 보노라면 이 능선과 계곡이 흡사 여성의 그 곳을 닮아서 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인지 옛날 경주 부윤이 부임하기 위해 내려오면서 이 곳을 지나게 되면 반드시 이 여근곡을 보게 되는데 재수가 없다고 해서 영천에서 안강으로 가는 노팃재를 넘어 돌아갔다고 한다.

 

    신라 제27대 선덕여왕은 매우 총명하고도 현명한 여왕이었다. 선덕 여왕이 중국의 황제로부터 작약 꽃씨와 그림 한폭을 선물로 받게 되었다.

 

    여왕은 이 선물을 펼쳐 보고 "이 꽃에는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는 의미 심장한 말을 했었다.

 

     신하들이 그 이유를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왜냐면 그 그림에는 나비가 그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자신에게 남자가 없는 여왕이라고 놀리려고 일부러 선물을 보낸 것으로 알아챘기 때문이다. 사실 황제가 보낸 꽃씨는 싹이 트지 않았다.

 

    이 씨가 삶은 꽃씨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선덕여왕은 날카롭고 예리한 통찰과 총명함이 있었다.

     때는 선덕여왕 5년의 일이다.

 

    어느 추운 겨울이었다. 어인 일인지 두꺼비 우는 소리가 왕궁안 옥문지에서 요란히 들려왔다.

 

    한 겨울에 두꺼비소리라니 가당치 않은 일이다.

    신하들은 틀림없이 어떤 불길한 흉조라고 수근거리고 있는데 현명한 여왕은 무슨 생각에서였슴인지 두 사람의 장군을 불렀다.

 

    그러면서 명령하였다.

 

  『지금 당장 달려가 서북쪽 여근곡에 적을 섬멸하라』라는 것이었다.

 

    지금 건천읍 신평리 썹들 여근곡에 출전할 것을 명령한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곳에는 500여명의 백제 기습군사가 숨어서 진을 치고 있었다.

 

    물론 출동한 신라군은 계곡 속에 숨어 잠복하고 있던 적군을 포위해서 섬멸하고 말았다.

 

   그 뒤 신하들은 여왕에게 어떻게하여 적군의 매복을 알아차렸느냐고 물었다.

 

   하얀것은 여자를 가리키는 것이고, 곧 이것은 서쪽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두꺼비가 하얀 것은 여성의 기운이 왕성한 그 곳 옥문의 여근곡을 가리키고 있다는 뜻이 된다. 그래서 옥문에 들어간 것은 힘을 잃고, 맥을 추지 못하고 죽는다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닌가.』 선덕여왕은 이렇게 설명을 했다.

    지금와서 아주 오랜 일을 확인하기는 어려우나 이 골짜기 속에 수백명의 군사가 숨어 있다가 기습전을 감행할 만한 곳은 못된다.

 

    다만, 지리적으로 여근곡에 대한 전설처럼 어찌 그리도 멀리 혹은 가까이서 보아서도 이상하리 만큼 그곳이 둥글고 또 돋아 있어서 가운데의 도툼한 모양은 그림으로 그려도 어떻게 여자의 그것과 흡사히 닮도록 그릴수 있을까 할 정도로 닮아 있다.

 

    그런데다가 그렇게 도툼하게 불그레한 한복판 밑에서는 사시사철 질퍽한 물이 가뭄없이 쏟아나고 있다.

 

    바로 그 밑에 물을 받아 가두어 두는 자그마한 연못이 바로 사서에 나오는 전설을 그대로 뒷받침해 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여근곡의 전설 그대로 산등성이 넘어 부산성에 적이 넘어 들어와 여기서 진을 친 것이 아닌가하는 추측을 갖게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또 6.25 때의 일이다. 두 달만에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인민군이 경주를 점령 직전에 Break가 걸리고 말았다.

 

    적의 밀물 같은 포화가 오봉산 아래에 있는 단석산을 향해 공격했지만 이곳은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명장 김유신 장군의 혼이 깃들어 있는 수련장이라, 그렇게 경주를 진격하려고 했지만 수포로 돌아 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또 한편, 이야기로는 이 서면에 위치한 여근곡인 썹들의 음기가 백제군을 견뎌내지 못하게 포로로 만들었듯이 인민군의 공격은 하필 경주 경계인 서면 외곽까지 들이닥쳐 왔지만 이상하게도 한발짝도 들어오지 못한 것이 바로 이 여근곡의 음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금도 향토적 전설로 전해지고 있다.

 

참고문헌 : 삼국유사

검 토 : 향토사학자 김태중

 

 

 

 

 

 

 

:: 맑은 하늘 아래 여근곡
 
 
 
 
 

맑은 하늘 아래 여근곡

 

 

 

 

2013년 05월 28일

 

Daum Cafe의 SXQ Site에서

복사하여

 

대한민국의 Yacht항인 경기 화성의 전곡항!........

그 전곡항 앞에M-Boat에서 단양의 화통 / 6K2FYL. 신영섭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