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5]
치욕이었던 '고종의 길'
때 ; 2012년 07월 24일[화요일]
곳 ; 서울 중구 정동의 덕수궁
누가 ; 두무골 댁과 화통
함녕전 곁의 출입문 3개
저 문중에 제일 우측[아래]의 문으로
두무골 댁 출입시켜
그림 하나 그렸었지요!
덕홍전!
마지막으로 살펴본 전각이었읍니다.
이때 나발불며 꿍꽝거리는 소리 문 밖에서 들리어
대한문 앞으로 달려가니 오후 2시가 살짝 넘기고 있었읍니다.
대한문을 내부에서 밖으로 촬영한 모습!
왜냐면 밖으로 나가지 못하므로!
저 우측 출입문의 궁녀 2명은 아나운서먼트를 열심히!...
그것도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로다가
번갈아가며 둘이서!
아마도 이 노란 복장을 취타대라 불렀겠지요?
수장 교대시에 제일먼저 들랄 날락 거립니다.
그 다음이 이 장졸들이!
들락 날락 합니다.
오전 11시와 오후 14시............그리고 15시 30분에
하루 3번 진행합니다.
누가 이 방송 수신하였었나요?
145.160 주파수에서 6K2FYL
대한문 들어선 곳에서 수문장 교대식 진행된다고
방송하였읍니다.
우측의 안내소에서 덕수궁의 안내 자료
구해 가실 수 있읍니다.
근엄하신 수문 장졸들 곁에 자리한
초라한 화통의 모습!
풀어헤친 앞 가슴은
군기가 빠져서.....
헤벌레!.....
덥긴 억수로 더운 날이었읍니다.
그날이!
이제 정문 나와서 신문고 앞에서.......
매표소는 저 창문 들여다보는
곳에서 \2,000원/인당으로 구입하고
우측문으로 입궐하고
퇴궐은 바라다 보는 화면 좌측 신문고에 가려질뻔한 곳으로
합니다.
대한문 좌측의 자장면집 앞으로 돌아가면 덕수궁 돌담길이 진행됩니다.
덕수궁 돌담길을 이젠 두무골댁하고 돌아도!
헤어질 일 없어서!
두무골 댁에게 신영섭의 인감까지
갖고 오라 하였건만
나와보니 대법원이 어디론가 이사도 가 버려서!......
도장을 못 찍었읍니다.
석조전 담장 밖에
덕수궁 돌담길의 비상 출입문 앞은
혹! 모를 태러 대비
석조물이 장치되어 있고
좌측 담장은 사진 촬영 금지 구역이어서
두무골 댁을 덕수궁 돌담길에 세우고
마지막 그림 하나 그렸읍니다.
2012년 07월 25일
의정부 집에서
단양의 화통/6K2FYL. 신영섭 올림.
문화
치욕이었던 '고종의 길'
산책로로 열리다
그런데 답사길에는 예상보다 참가자가 많았다.
'고종의 길'은 조선 마지막 왕의 길을 뜻하니 그 길이 어떤 길인지 사람들의 호기심은 당연히 클 것이고, '임시 개방'이란 말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니, 골목 답사의 하나로 걸을 이유는 충분하다.
과연 저기에 길이 있었고 고종은 그 길로 갔을까? 1896년 2월11일 새벽 고종이 왕세자 등을 데리고 경복궁 건청궁을 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갔을 그 길을 상상하곤 했다.
'고종의 길'을 포함해서 서울 역사박물관까지 약 2㎞가량을 걸었다.
[한겨레]
다음달 정식 개방하는 ‘고종의 길’ 사전 답사
8월 임시 개방된 ‘고종의 길’ 따라
골목길 답사단 이끌고 현장 돌아
아관파천 길 어디인지는 불분명
영대사관과 협상 끝 일부 반환받아
유난히 무더웠던 여름의 끝자락에 궁궐을 걷는 것은 괜찮은 선택이었다. 궁궐이라기보다는 옛 궁궐터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문화재청이 8월 한 달 동안 임시 개방한다고 발표한 ‘고종의 길’[덕수궁 돌담길에서 정동공원과 러시아 공사관까지 이어지는 총 120m길]은 덕수궁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깥 길이기 때문이다. 답사 예고를 페이스-북에 올린 것은 한 ‘페친’[페이스북 친구]의 제안이었지만 진작 생각하고 있던 계획이기도 했다.
그런데 답사길에는 예상보다 참가자가 많았다. 넉넉히 준비해둔 자료집이 부족할 정도였다. 맹렬한 더위가 이제 막 지나가는 시기이니 그동안 참고 참았던 외출의 유혹이 있지는 않았을까? 아니면 이때가 아니면 볼 수 없는 특별한 것이 있어서일까!
‘고종의 길’은 조선 마지막 왕의 길을 뜻하니 그 길이 어떤 길인지 사람들의 호기심은 당연히 클 것이고, ‘임시 개방’이란 말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니, 골목 답사의 하나로 걸을 이유는 충분하다.
언젠가 서울시청 건물이 당시 서울시장에 의해 중장비로 뜯겨 나가는 날 뒤편 프레스센터 옥상에 올라 사진을 찍으며 그 길을 상상하며 유심히 보아두었다. 과연 저기에 길이 있었고 고종은 그 길로 갔을까?
1896년 2월11일 새벽 고종이 왕세자 등을 데리고 경복궁 건청궁을 나와 러시아공사관으로 갔을 그 길을 상상하곤 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 길을 찾고자 자료를 찾고 걸어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각국 대사관들이 점거하고 있는 그 길은 걷지 못했다.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마당에 모인 답사단은 영국대사관 정문 앞에서 막힌 돌담길을 보고 빙 돌아 대한문 안을 통과하여 돌담길이 될 지점으로 이동한다.
‘고종의 길’을 포함해서 서울 역사박물관까지 약 2㎞가량을 걸었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덕수궁 돌담길 연결하기를 한 성과를 보기 위해서다.
박 시장의 4년에 걸친 이 사업은 돌담길을 막고 있는 영국대사관과의 길고 긴 협상의 길이기도 했다. 박 시장의 노력 덕택에 덕수궁 북측 돌담길 200m 정도의 길 중 120m는 돌담길로 시민에게 돌아왔다. 그러나 마지막 80m는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이미 영국대사관의 건물이 깔고 있기도 했다. 결국 서울시는 국가사적 제124호 덕수궁의 경내에 길을 내어 덕수궁 돌담길을 잇기로 하고 문화재청과 협의했다. 문화재청은 지난 4월 문화재위원회를 열어 그 방안을 통과시켜 덕수궁 돌담길이 궁궐 안으로 들어오게 됐다.
서울시는 이 구간의 공사를 9월 한 달 동안 완료해 덕수궁을 한 바퀴 돌 수 있는 덕수궁 돌담길을 완성하고 문화재청은 시범적으로 개통한 ‘고종의 길’과도 연결해 10월 일반에 정식 개방할 예정이다.
우리 답사단은 3년 전 정동 답사를 하면서 영국대사관 앞에서 돌담길 반환을 요구하는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다. 큰 종이에 글자 한 자씩을 써서 들고 영국 대사에게 전해지기를 바라며 카드섹션을 했던 것이다.
환수된 돌담길 120m를 가기 위해 임시로 만든 협문을 통해 나간다. 1950년대 말부터 영국대사관이 점유했던 길이 훤하게 뚫렸다. 그간의 역사적 과정도 사진과 지도로 전시해두었다. 답사단은 드디어 이 짧은 길에도 많은 역사적 사연이 있음을 본다.
이 돌담길 끝에서 ‘고종의 길’과 만난다. 사실 ‘고종의 길’이란 의미가 뭔지에 대해 뚜렷하게 설명하기에는 아직도 의문스러운 점이 없지 않다.
옛 경기여고 터, 말하자면 옛 선원전 터로 들어서자 바로 그 ‘고종의 길’이 나타난다. 옛 사진에 보이는 그 길과는 다르게 보이지만 어쨌거나 미국 대사관저와 경기여고 터 사이의 그 경계선은 맞다.
이 길이 아관파천 때 고종이 간 길일까? 혹은 덕수궁으로 移御[임금이 거처하는 곳을 옮김]한 후 비상시에 이용하려 했던 길일까?
‘고종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짤막한 기록만 있다.
이 기록에는 아관파천 시 경로는 밝히지 않았다. 이 길이 항간에 떠돌았던 ‘러시아공사관 비밀통로’였을까? 아니면 러시아 공사관 땅속에 덕수궁과 연결된 지하 통로가 있을까?
아직 다른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으니 이 길이 아관파천의 길이었는지, 또 비상통로였는지, 둘 다이었는지 알 수 없다.
글·사진 김란기 살맛나는 골목세상 대표
2018년 09월 20일
누군 백두산 산행하고
비 오다가 그친 날
시원해지고 있다고
충북 단양의 투구봉 주유소에서
단양의 화통 / 6K2FYL. 신영섭
한겨레신문의 귀중한 게시물을 복사하여
여러 사람들이 보시고 알수 있도록 올림.
122년 만에 복원한 '고종의 길'
무엇을 배울까?
공감[Weekly] No. 466호
[장가현 위클리 공감기자]
2018. 08.13 ~ 08. 19
Page 22 ~23
1895년 음력 8월20일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에게 시해됐다. 황후가 피살되자 불안해진 고종은 한밤중에 景福宮[경복궁]을 빠져나와 慶運宮[경운궁], 지금의 德壽宮[덕수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일본의 입김은 날이 갈수록 거세졌다. 조정에 친일 내각을 만들어 단발령 같은 급진적인 사회개혁을 시도했지만 이에 반발한 백성들이 들고 일어났다. 전국에서 의병 봉기가 일어나 중앙의 친위대까지 의병 진압에 나섰다.
수도 경비에 공백이 생기자 고종은 일본의 눈을 피해 1896년 2월 11일 德壽宮[덕수궁]후문으로 宮을 빠져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다. 이것이 俄館播遷[아관파천]이다.
고종은 1897년 2월20일 德壽宮[덕수궁]으로 환궁할 때까지 약 1년여를 러시아 공사관에서 생활했다.
고종이 구 러시아 공사관으로 향했던 '고종의 길'은 서울 중구에 있는 德壽宮[덕수궁]서북쪽 구세군 서울제일교회 건너편에서 정동공원,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지는 총 120M 길이다. 문화재청은 이 길을 3년여 동안 복원한 후 2018년 8월 한 달간 시범 공개했다. 정식 개방은 2018년 10월이다.
고종이 러시아로 향했던 길은 德壽宮[덕수궁] 안에 있던 璿源殿[선원전] 터가 중심이다. 璿源殿[선원전]은 조선왕조의 어진과 신주를 모셨던 장소다. 璿源殿[선원전]터는 '고종의 길' 복원공사가 시작되기 전에는 빽빽한 빌딩 숲 사이에서 어울리지 않게 홀로 비어 있던 땅이었다.
俄館播遷[아관파천] 당시만 해도 자리를 지키던 璿源殿[선원전]은 1900년 화재가 발생하면서 현재 정동 1~8번지인 북쪽 守禦廳[수어청]자리로 옮겼다.
원래 璿源殿[선원전]이 있던 곳은 1920년 德壽宮[덕수궁]이 축소되면서 경기여고와 주한미국대사관저 등의 부지로 사용됐다. 이후 1986년 서울시와 미국대사관은 을지로에 있는 미국문화원과 경기여고가 있는 부지를 교환하는 내용의 양해각서를 체결한다. 1988년 경기여고가 서울 강남구 개포동으로 자리를 옮기자 미국은 이자리에 대사관 직원들의 숙소를 지으려 했지만 건축법 때문에 건축 허가가 나지 않았다. 이후 이 부지가 德壽宮[덕수궁] 터였다는 사실이 알려 지면서 전국의 시민단체에서 대사관 기숙사 건립 반대 운동을 펼쳤다.
결국 2011년 한미정부간 협의에 따라 토지 교환이 이뤄지면서 德壽宮[덕수궁] 터였던 璿源殿[선원전] 부지가 우리나라로 귀속됐다.
'고종의 길' 은 璿源殿[선원전] 부지와 미국공사관 소유의 땅 경계에 있다.
'고종의 길' 을 방문하려면 德壽宮[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정동교회를 지나 정동으로 향해야 한다. 고종이 밟았던 길 그대로를 따라 가려면 지난해 8월 개방된 구세군 서울제일교회 쪽 돌담길에서 출발하는 것도 좋다. 각종 사료에 따르면 고종은 德壽宮[덕수궁] 북쪽에 있는 會極門[회극문]을 나와서 璿源殿[선원전]영역으로 들어갔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근대사 비극의 서막을 연 역사현장
'고종의 길' 에 특별한 볼거리는 없다. 본격적으로 들어서면 璿源殿[선원전] 터를 복원하는 공사현장이 눈에 띈다. 그 안에 '조선저축은행 중역 사택' 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일제 강점기인 1938년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지은 건물이다.
해방 후에는 미국대사관이 부대사의 숙소로 썼다. 사택은 고종의 길을 임시개방하는 2018년 8월에만 볼 수 있다.
내년[2019년]부터 璿源殿[선원전] 영역을 발국 조사하기 위해 올해[2018년]안에 철거할 예정이다. 사택이 있는 동안만 볼 수 있는 과거의 흔적과 역사의 숨결을 직접 확인하고 싶다면 방문을 서둘러야 한다.
사택을 지나면 德壽宮[덕수궁] 돌담같은 담장이 이어진다. 오르막으로 이어진 길 끝에는 정동공원이 모습을 들어낸다. '고종의 길' 을 나와 오른편으로 옛 러시아공사관 건물이 보인다.
고종이 떠났던 길의 종착지다.
俄館播遷[아관파천]의 결과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 조선의 국력손상으로 이어졌다. 일본 세력을 누르기 위해 러시아 힘에 기댄 지도자의 무능함과 나약함을 상징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고종은 독립협회를 비롯한 여론의 비난에 못 이겨 파천 1년 만인 1897년 2월 20일 德壽宮[덕수궁]으로 환궁했다.
같은 해 10월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나라의 주권을 세우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우리 근대사 비극의 서막을 연 역사 현장인 '고종의 길' 은 월요일을 제외한 오전 9시부터 오후6시까지 무료로 방문할 수 있다.
2018년 10월 07일
내 곁으로 자꾸만 다가오는 날
충북 단양의 장촌말 집에서
단양의 화통 / 6K2FYL. 신영섭은
문호체육관광부가 발행하는[위클리 공감 ; No. 466호] 장가현 위클리 공감기자의
122년만에 복원한 '고종의 길'. 무엇을 배울까! 를
Copy하여
이를 널리 알리고자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