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곡 서원
문화재 명 ; 향토유적 문화재 제 1호
위 치 ; 경기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585번지
17세기 중엽 남양부[남양 홍씨의 본향]지역의 유일한 서원으로, 이 지역 출신인 도원재 박세희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향사한데서 비롯됐으며 추후에 박세훈, 홍섬 두 분을 추가로 봉안했다.
한때[조선 말 대원군 시대]는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기도 했으나, 1976년 이 고장의 유림과 문중의 협력으로 복원됐으며, 1986년에 향토유적 제 1호로 지정됐다. 매년 지역 유림과 문중에서 제를 올리는데 올해는 03월 21일에 향사한다.
제향참관 문의 ; 화성문화원
사진 ; 김종오 향토 사진작가
정조의 초장지를 찾아서
조선의 22대 임금인 정조[이름은 이성]는 죽어서 두번 묻혔다
,
한번은 1800년 06월 할머니 정순왕후 앞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고 아버지 장헌세자의 능인 융릉의 동편 언덕에 묻혔다. 또 한번은 21년 부인 효의왕후가 죽자 건릉에 합장된 것이다.
그때부터 200여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지금 그의 초장지는 세간의 떠들썩한 관심거리가 되었다. 지금의융릉과 건릉이 자리잡고 있는 花山[화산]으로부터 흘러나온 여맥의 어딘가에 분명 그의 초장지가 있을 터. 그 위치가 정확히 어디인지 알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의 융릉과 건릉 외곽 경계 울타리 가까운 곳에 불룩 솟아 마치 큰 무덤처럼 보이는 지역이 정조의 초장지일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또 의궤에 기록된 재실터가 LH공사의 지원으로 발굴조사되어 태안 3지구라고하는 택지개발 사업과정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이 초장지에 대한 기대는 더 커졌다. 이에 대한 발굴조사는 국립문화재 연구소에서 직접 시행하였다. 발굴 조사결과 왕릉의 조영에 어울리는 많은 부장품과 관련된 유물이 출토됐다. 각종 제기의 미니어쳐[명기라고 한다]와 제례용 악기, 왕실용으로 광주의 분원에서 특별히 제작된 백자 그릇 등. 왕실 위세에 맞는 부장품들과 각종 돌짐승이 놓였던 자리, 그리고 둘려졌던 곡장의 흔적은 그 자리가 정조의 초장지임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정조의 시신이 처음으로 묻혔던 초장지는 그렇게 우리에게 나타났다. 조사결과를 말표하던 날, 발굴 현장에는 비가 내렸다. 그 현장을 바라보는 속인들은 각자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정조의 초장지를 가지고 왕릉의 범위를 넓혀야 한다느니 하는 지극히 세속적이고 속 들여다보이는 욕심들을 부리기보다 우리는 그의 정신을 찾아보아야 한다.
그의 시신이 묻혀있는 자리를 통해 과거를 돌이켜 보고 조선 왕조의 후반부에 가면서 소인배들이 사리사욕에 급급해 나라를 망쳐가는 모습과 그에 대항해 기준을 세우고 바른 국가를 세우려 노력했던 영민한 왕의 정신세계를 찾아 보아야 할 것이다.
화성의 참된 정신문화는 정조의 효 사상을 중심으로 한다. 물론 정조의 아버지에 대한 효심은 익히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드러나는 "효" 라는 한정된 모습으로 정조를 정의하는 것은 그의 일부만을 바라보는 시각이라고 생각한다.
정조의 많은 치적은 백성을 평화롭게 보호하는 것,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고 무술을 연구하여 부국강병을 이루는 왕으로의 기본적인 역할에 충실함에 기초하였다. 정조는 그러한 치국을 위한 첫 방편으로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간, 그리고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하고 자기 배만 불리는 권문세도가의 축출을 위해 융릉에 대해 12차례나 대규모의 원행[선친의 묘소를 배알하는 왕의 공식적인 거동행차]를 시행하였다.
이를 통해 그가 꿈꾸던 이상적인 국가를 만들어 가려한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효심이라는 지극히 현대적인 가치만으로 정조의 국가 운영에 대한 깊은 고민을 설명할 수 있겠는가. 드러난 정조의 초장지를 보면서 그와 똑 같은 이상을 꿈꾸고 같은 고민을 하는 관료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빠져본다.
김충배 경기도 문화재 전문 위원
화성신문
제272호 2012년 03월 19일~03월 25일자 8면
상부 좌우의 기사와 사진을
2012년 03월 25일
대한민국의 Yacht항인 경기 화성의 전곡항!..........
그 전곡항 앞에 M-Boat에서
단양의 화통 / 6K2FYL. 신영섭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