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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포!

단양의 화통 2012. 3. 10. 16:01

 

 

대원군의 한,  

조선의 한이 서린 마산포!

 

마산포!

화성시 문화유산 산책[2]

 

 

 

      화성시 남양[면]에서, 사강을 거쳐 북서쪽으로 이어진 322번 지방도를 타고, 반도 끝 머리에 이르면, 고포리라고 하는 고즈넉한 마을에 이른다.   지금은 간척으로 사방이 막힌듯 답답하며, 옛 자취를 가늠하기 쉽지 않지만, 한때는  서해의 물산을 近畿[근기]지방과 중앙에 실어 나르던 대항이 있었다.  그 항의 이름은 마산포다.  그리고 이 마산포는 구한말 드세디 드센  외압에 맞서, 국운을 일으키려 했던 흥선 대원군 이하응이, 청나라에 압송되어 갔던, 역사적 한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조선조에는 총 4명의 대원군이 있었다.  대원군은 왕이 후사가 없이 죽게 될 경우 종친 중에서 왕위를 잇게 된 종친의 부친을 일컬어 부르는 호칭이다.   선조의 아버지 덕흥대원군인조의 아버지 정원대원군철종의 아버지 전계대원군,  그리고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바로 그들이다.

 

      흥선대원군은, 철종이 후사가 없이 죽게되자, 둘째 아들이 왕위에 오르게 되면서  정계의 전면에 나서 국사를 운영하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손자 즉 고종과 명성황후 사이에 출생한 아들이, 항문이 막혀 죽어가는 와중에도, 외국 의사들의 힘을 빌리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려, 결국 원자가 죽는 사태까지 발생할 정도로, 외세에 대한 강한 반발심을 가지고 있었다.   더구나 서양 외세와, 왜는 한 통속이라는 倭洋一體[왜양일체]라는 생각을 뿌리 깊게 간직하고 있었으니, 내치는 고사간에 온통 조선을 집어 삼키려는, 야욕이 꿈틀거리는 외세들의 공공의 적이 되었다.

 

     이렇듯, 강력한 쇄국정책을 고수하던 흥선대원군은, 고종이 섭정을 벗어나 친정을 하게되면서 정계를 잠시 떠나게 되었다.   이에는 며느리 명성황후의 영향도 컸다[사랑하는 아들을 고집장이 媤父(시부) 때문에 잃게된 그녀의 한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다 임오군란을 계기로 다시 정계에 돌아오는데, 이 때 군란의 원인을 제공했던 명성황후는 죽지않고  돌아와 청에 원군을 요청하게 되었다.

 

     호시탐탐 조선에 발을 붙일 구실만 삼던 청은, 대군을 이끌고 바로 마산포로 상륙하고, 한양으로 진격해 흥선대원군 이하응을 체포하여 천진으로 압송해 간다.    한양에서 마산포 300리 길을, 하룻 밤새 끌고 왔다고도 한다.   이후  천진에서 4년간 유폐되었다가,  다시 환국해 운현궁에서 머무르며 재기를 노렸지만, 끝내 저물어 가는 조선의 국운과 같이, 그 자신의 운명을 되돌리지는 못했다.

 

 

      비 내리는 마산포 300리길.  그는 무슨 생각을 하며 그 길을 걸었을까.   동이트면 목적지도 모르는 채 또 다시 끌려 갈텐데,  마산포의 허름한 민가에서 그는 무슨 생각을 하며 그 밤을 지새운 걸까.  굉음속에서 시커먼 연기를 내 뿜으며 움직이는 증기선 선실에서, 또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지금은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다만 아직도 선조로부터 마산포에 얽힌 구한말의, 아픈 사연을 듣고 기억하는 주민을 만나 볼 수 있어, 국가의 최고 정치 수반이 하룻밤새 외세에 개 끌려 가듯 끌려가는, 망국의 한이 그다지 멀지않은 과거에 벌어진 역사라는 점을 일깨워 준다.   

 

마산포는 조용히 그렇게 웅변하고 있다.  또다시 그런 역사를 되풀이 할 것이냐고.

 

 

 

2012년 03월 05일~30월 11일

 

화성신문 제270호 8면

우측 상단의 김충배 LH 동탄 사업부

문화재 담당 차장의 기사를

 

2012년 03월 10일

 

대한민국의 Yacht항인 경기 화성의 전곡항!.........

그 전곡항 앞에 M-Boat에서

 

단양의 화통 / 6K2FYL.  신영섭 옮겨적음.

 

 

 

마산포

 

 

 

 

 

 

      풍도와 덕적도로 통하는 이 바다는 마산포와도 닿아 있읍니다.

흥선대원군이 이 바다 앞에서 끌려가게 된 사연은 다음과 같읍니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 마산포(현 경기도 화성군 송산면 고포리)는  청나라 장수 위안스카이(원세개-袁世凱) 가 청군을 이끌고 상륙한 곳이다.

 

7월초, 청나라 군대가 도착했다.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은 임오군란의 소식을 듣고 마건충, 정여창에게 해군 수천을 거느리고 조선에 출동하게 하였다.

청나라 군대는 남대문 밖까지 와서 진영을 설치하고 대원군을 초청하였다.

     대원군은 가고 싶지 않았으나 아니 갈 수가 없어 당도하니, 모든 이들이 정성스레 맞이했다.

두 번째 갈 때도 그러했다.

 

     세 번째 갈 때 대원군이 수레에 오르니, 정현덕이 말리면서 "대감, 이번에 가시면 반드시 돌아오시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으나 대원군은 듣지 않았다.

     진영 제1문에 이르니 가마에서 내리라하고, 제2문에 이르니 따라온 이들을 못 들어가게 막았다. 전일과 달라서 비로소 변이 있는 줄 알았으나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마건충이 결박을 지으라 명하고 대원군의 입을 막아 소리를 지르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가마에 태워 힘세고 날랜 장정 한 패에게 마주 들게 하고 후문으로 빠져나갔다. 곧장 동작나루를 건너 경기도 남양 마산포에 이르러 배에 태우고 떠났다[다른 기록에 따르면, 장마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이날 밤새도록 대원군 호송 길에 나선 청군은 수원을 거쳐 비봉, 남양, 송산, 마산포까지 100㎞ 거리를 강행군했다]

 

     27일 낮 포구에 도착한 대원군은 기다리던 덩잉조우(登瀛洲)호에 실려 청으로 갔고 북양함대가 있던 톈진의 바오딩부(保定府)에 이후 3년간 유폐된다.

다음날, 청나라 군대는 남대문에 방문을 붙였다. 내용은 이러했다.

    "민비 시해에 관해 대원군에게 알아볼 것이 있다. 민비 시해에 관여했다는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가리기가 곤란해서 황제가 한 번 물어보고자 대원군을 데려갔다. 사실을 듣고 곧 돌려보낼테니 인민들은 놀라지 말라."

     이에 온 나라가 술렁거렸다.

민비는 충주 장원촌에 머물고 있었는데 대원군이 폐해짐에 따라 창덕궁으로 돌아왔다.


대원군은 마산포에서 하루 밤 자고 배로 어도에 가서 어도 앞에 정박한 청 군함에 승선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당시 아산만은 큰 바다이기 때문에 청나라 모선은 깊은 바다에 정박하고 작은 배를 통해 이동 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오페르트도 아산만에 모선은 정박 시키고 작은 보트를 이용해 예산의 구만포까지 이동한 뒤 남연군 묘를 파헤친다.

 


2015년 01월 24일

 

Daum의 내포문화 시민네트 Cafe의 자료 복사하여

 

날씨 푸근한 날
경기. 포천의 송우리에서

단양의 화통 / 6K2FYL. 신영섭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