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령 또아리 굴 사건
죽령폭포 아랫녘에서 중앙선 철도 죽령굴이 시작된다. 굴 입구에는 괴한[불순분자]들의 공격에 대비하여 철조망을 두르고 근무자까지 배치하여 놓았다. 1950년 전후의 대립이 심할 때 빨치산들의 공격이 더러 있었다고 한다.
중앙선 철도는 경부선 다음가는 중요한 철길이다. 여객 우송으로는 경부선에 밀리고 화물 우송에는 단연 으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중앙선은 1936년 일제에 의해 지하자원 수탈을 목적으로 처음 부설되었으며 지금도 한반도의 중동부 지역의 Cement 라든가 기타의 지하자원을 실어 나르는 중요한 수단이 되고 있다.
죽령 굴을 들어가려는 화물 기차가 빠앙 하고 경적을 울리면 온 산골짜기가 쩌렁쩌렁 울리고 들썩거린다. 골짜기에서 듣는 기차의 기적소리는 무시무시한 바람까지 일어 소름마저 돋는다.
죽령에는 큰 굴이 두 개가 있다. 죽령 굴도 만만치 않지만 이보다 더한 굴은 바로 죽령 역 못미처 있는 당동리의 노루고개 가는 곳에 있는 또아리 굴이다.
전문 용어로는 Loop 식이라고 한다. 1946년 중앙선 전 구간이 개통된 지 7년째 되는 해였다. 이 해에 죽령 또아리 굴을 지나던 여객 수송 열차가 우리나라 철도사상 유래 없는 대형 사고가 발생했는데 사건 개요는?
평지를 달려온 기차가 산맥을 넘기 위해서 흔히 쓰는 방식이 Loop Type or Switch Back Type이다. 기차는 자동차와 달이 급경사의 고갯길을 오르지 못한다. 따라서 산을 지그재그로 산을 오르거나 또아리 굴처럼 땅 속을 크게 원을 그리며 돌아 고도를 높혀야 한다.
Switch Back Type은 제천에서 강릉으로 가는 기찻길의 태백선 기찻길에 하나가 있고 Loop Type은 원주 치악 재와 단양 소백산의 죽령 재에 각각 하나씩 있다. 즉 땅 속에서 크게 원을 그리며 돌다보니 자연 굴의 길이가 길어지게 마련이다.
그날 단양역을 출발한 기차는 대강면 당동리 뒷산 또아리굴을 지나 죽령역에 도착하게 되어 있었다. 참고적으로 이 굴은 자그마치 약 6Km나 된다.
사고는 1949년 08월 18일 ㏘18시 25경에 발생했다. 서울에서 출발한 안동행 505호 기차는 객차 06량을 달고 운행 중이었다. 기차가 굴에 진입하고 나서 얼마 있지 않아 객차와 객차 사이의 연결 부위에 이상이 발생한 것이다. 정확한 사유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이것이 어떤 Break 작용으로 연결되면서 기차는 멈춰 서게 되었다. 기차가 앞으로 더 나아가려고 석탄을 더 넣었으나 더 나가지 않고 나갈 듯 나갈 듯 하다가는 멈춰서고, 이렇게 반복되는 동안 굴 안에는 증기 기관차에서 쏟아져 나온 매연과 수증기가 전장 약 6Km의 굴속을 가득 채우게 되었다. 이 때문에 객차는 질식 상태에 가까운 아비규환의 상태가 되었으며 이 사실은 굴 입구의 감시자에 의해 신속하게 보고는 되었으나, 원체 열악한 조건의 산중이고 비 또한 엄청 내렸으므로 02시간여 지나서야 구조대가 도착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사태가 악화 될 때로 악화된 후였으므로 45명이란 엄청난 사망자까지 발생하고 말았다.
원래 이 또아리 굴은 전기 기관차로 통과하도록 설계되었으나 미처 시설을 갖추지 못하여 석탄을 때는 증기 기관차로 계속 운행을 하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일제 말기에 부설된 중앙선은 그 후에 Diesel 기관차를 거쳐 1988년에 가서야 영주-단양 구간에 가까스로 전기 시설을 갖추고 전기 기관차를 운행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일제의 기술자들은 잔인한 굴 굴착법을 사용하였다. 약 6Km의 환기 시설이 없는 터널에 증기 기관차를 운행한다는 발상은 참으로 무모하다. 물론 발상은 전기 기관차라고 하지만 당시에 전기설비가 가능했겠는가? 그러니 그냥증기 기관차로 다니겠다는 뜻과 다를 바가 없다.
Diesel 기관차로 다닐 때에도 또아리 굴을 지나오면 콧구멍이 새까매지고 더운 여름철에 유리창을 급하게 닫는 진풍경이 벌어지곤 했으며 다른 지역 사람은 영문도 모르고 창을 닫지 않다가 옆 사람에게 핀잔은 핀잔대로 듣고 매캐한 매연으로 옷가지며 온 객실이 난리가 발생하는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지곤 했다.
Diesel 기관차가 이랬는데 증기기관차로 다닐 때 일이었으니 오죽했겠는가! 참으로 개떡 같은 중앙선[그때는 ; 당시는 경경선으로 서울과 경주를 오갔음]철도가 아닐 수 없다.
중앙선 얘기가 나온 김에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중앙선 열차를 타고 단양에서 서울을 자주 다녀 본 사람은 잘 알고 있으리라. 열차 선로의 대부분이 산의 남쪽 기슭을 지나간다는 사실을. 이것은 우리 전통의 배산임수 형 마을과 일치한다.
중앙선 기찻길이 산의 남쪽을 지나가니 요즘 시공된 중앙 고속도로는 산의 북쪽을 지나갈 수밖에 없다. 기차는 겨울에 날씨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으므로 산의 북쪽에 건설되어야 하고, 고속도로는 산의 남쪽에 건설되어 따사한 겨울 햇살을 받아야 순리인데.......
그러나 일제가 처음 중앙선을 부설할 때, 산의 남쪽을 택하여 먼저 선로를 부설했기 때문에 중앙 고속도로는 어쩔 수 없이 산의 북쪽에 부설되어야 했다.
그런데 왜 일제는 산의 남쪽으로 선로를 부설했을까?
기차 여행객에게 따뜻한 겨울 햇볕을 제공해 주고자 했음인가? 아니면 측량을 하다 보니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일까?
그도 저도 아니라면 배산임수하고 사는 우리나라 전통의 부락들을 파괴하려는 음모인가!
지나간 역사이지만 일제의 악의가 개입되지 않았기를 바란다.
본 이야기는
단양군에서 2001년3월1일 재판 1쇄 펴낸 단양의 향기 찾아 의
p46~p49까지에서 발췌하여
2009년 09월 29일
단양의 화통 /6K2FYL. 신영섭이
옮겨 적은 글임을 밝혀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