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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Radio [시험방송]전파!

단양의 화통 2011. 3. 10. 08:27

 

87년 전 본사 라디오 시험방송.....청취장에 수만명 몰려

 

     1924년 12월 17일 오후 1시 영화를 상영하기엔 한참 이른 시각인데도 경성 관철동의 영화관 ‘優美館[우미관]’ 앞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조선일보사가 주최한 ‘무선전화 공개방송시험‘, 즉 라디오 시험방송을 들어보려고 온 사람들이었다.  이보다 한달 전인 11월 총독부 체신국이 청사[현 광화문 우체국 자리]에 방송실을 차려 놓고 음악, 연극 등을 최초로 시험 방송하는데 성공했지만, 민간이 주도한 시험 방송은 조선일보사가 처음으로 해 냈다.

 

      1,927년 경성방송이 개국하여 정규방송 시대가 열리기 3년 전이었다. 수표동 조선일보사의 기와집 사옥에서 쏘아 올린 전파가 ‘優美館[우미관]’ 무대 대형 수신기의 나팔에서 흘러 나왔다.

 

     조선일보 사장인 月南[월남] 李商在[이상재]선생의 연설이 이어지자 객석에서 우뢰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 조선말이 라디오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온 것 자체가 처음이었다.

 

     3일간 이어진 시험방송의 프로그램은 다채로웠다. 李東伯[이동백], 宋萬甲[송만갑], 朴綠珠[박녹주] 등 판소리 명창들의 노래李王職 雅樂部[이왕직 아악부 ; 국립 국악원의 전신]명수들의 거문고. 퉁소. 해금. 등의 연주가 방송됐다. 동요 작곡. 작사가이자 성악가였던 21세 청년 음악가 윤극영이 Mic. 앞에서 '반달‘을 불렀고 26세 홍난파의 바이올린 독주도 조선일보 전파를 탔다.

 

 

     라디오 시험방송 청취장에 몰린 인파는 ‘수만 명’이었다고 당시 조선일보는 보도했다. 입장권을 나눠주던 남대문 통 조선일보 경성 판매소 앞은 인파 때문에 전차 통행이 일시 중단됐다. 본지 12월 18일자 ‘경이의 눈 경이의 귀!’ 기사에서 한 여성 활동가는 “사람은 오래 살 것이올시다. 내 평생에 이 같은 신기한 조화를 볼 줄은.....” 이라고 경악했다.

 

     이후에도 조선일보사는 경성방송 개국 전까지 전국 수십 개 지역을 돌며 Radio 시험방송을 계속했다. 방송문화 진흥회가 펴낸 ‘한국방송총람’에 따르면 일제하 조선일보사는 방송을 함께 경영하려는 생각이 있었으며, 실제로 총독부에 방송사업 허가 신청도 냈다. 그러나 총독부는 親日[친일]방송인 경성 방송만 허가했다.

 

 

     비록 방송국 개국으로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1,924년부터 시작된 조선일보의 우리말 Radio 시험방송은 정규 방송보다 앞서 동포들에게 ‘첨단미디어’ Radio를 맛보게 했다.

 

    당대의 어떤 노객은 “Radio문명으로 인하여 세계는 更生[갱생]하였다. 과거에 있어서 문명이라 참칭하던 모든 것이 이제는 Radio 앞에서 오직 그 잔해를 남길 뿐이다! 아아 세계의 인류는 깃버하라! Radio! Radio! Radio!" [1,925년 07월 29일자 조선일보]

‘Radio문명 및 기타에 대한 雜感(잡감)’라고 까지 흥분했다. 이렇게 Radio는 1920~30년대를 관통하며 첨단 과학 무명의 아이콘이 되어 갔다.

 

 

 

김 명환 사료 연구실장 [wine813@chosun.com]

 

조선일보 제28051호

2011년 03월 08일 화요일 51판 A33면 우측 하단 기사를

 

2011년 03월 09일

청평 강가에서

 

단양의 화통 / 6K2FYL. 신영섭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