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령[竹嶺]
죽령은 충북 단양군과 경북 영주시를 경계로 하는 해발697m의 큰 고개이다.
이 고개 정상에서 연화봉쪽으로 고구려가 축성한 산성이 있다하여 찾아보았으나 세월이 흘러 저곳이 산성이려니 하는 눈짐작만 있을 뿐 찾을 길이 요원하다.
죽령 길은 아달라(阿達羅) 이사금(尼師今) 5년(서기158년) 신라에 의해 죽령로가 개척되어 계립령(서기156년 개척)과 함께 신라의 북방 진출의 통로로 이용되었다.
이 길은 죽죽이 장군에 의하여 서기158년 3월에 개통한 후 죽죽이 장군이 사망하자 고개 서쪽에 죽죽사를 짓고 불상을 모셨다한다.
더운 지방에 살던 대나무가 혈기 왕성한 청년이 되어서 북쪽지역에 야심을 품게 되었다.
남쪽은 바다가 막고 있어 갈 수가 없고 동쪽과 서쪽도 길이 끊어지기는 매한가지다.
나아갈 곳은 북쪽뿐이었다.
이때 동료들을 규합하여 요란법석하게 짐을 꾸릴 적에 장노가 나타나 충고를 한다.
가면 아니 되네. 내 말을 듣고 부디 가지 마시게.
혈기 왕성한 젊은 대나무들이 노인의 얘기를 귀담아 들을 리 만무했고,
짐이 꾸려지는 즉시 길을 떠났다. 경상도의 너른 벌을 지날 때는 그야말로 파죽지세(破竹之勢)였다.
따뜻한 난류를 따라 동해로 북상하는 무리들은 어느새 삼척을 지나 강릉에 도착하고 있었다.
이에 자극된 경상도 내륙의 대나무들은 대구에서 안동, 영주로 이어지는 길을 재촉하여 어느새 풍기까지 도달했다.
풍기에서 다시 북상을 하던 대나무들은 뭔가 심상치 않은 바람이 소백의 고봉들에서 쏟아져 내리는 것을 느낀다.
시베리아에서 왔다는 냉혹한 엄동의 한파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처음의 당당했던 포부를 기억하고는 강행군을 하기로 마음먹는다.
한 걸음 한 걸음 그들 일행은 소백산을 오른다. 산은 올라갈수록 춥다. 중턱을 겨우 올라갔을 무렵 동료들 중 반은 벌써 낙오하기 시작한다. 그 중 기가 센 몇몇은 이에 굴하지 않고 고개를 넘자고 다짐을 보인다.
몸은 자꾸만 움추려들고 따뜻한 남쪽 출신들인 그들은 하나, 둘, 오한을 느낀다 고갯마루에 올라섰을 적에 그들은 환희대신에 절망을 맛보게 된다. 고개를 넘는 자들은 모두 추위에 숨이 끊어지고, 살아있는 자들은 부득불 고개 남쪽의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곳에 몸을 묻고 견디기로 한다. 그 후 그들은 초췌해진 모습으로 고갯마루에 눌러 앉은 뒤 삶을 이었고 끝내는 고개를 넘지 못하고 만다.
전하는 얘기에 의하면 신라 아달라 이사금 5년, 서기 158년 춘삼월에 죽죽이 장군이 처음으로 죽령 길을 열었다고 한다.
죽(竹)령을 죽죽이 장군이 개설했다는 이야기와 죽령이 대나무의 북방한계선 이라는 사실을 놓고 비교해 볼 때 죽령이라는 고개이름은 대나무의 북방한계선이라는 특성에서 연유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소백산에는 북쪽인 단양 땅에는 조릿대가 전혀 없고 남쪽인 영주 땅에는 조릿대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죽죽이 장군이 개설했다는 것도 왜 하필이면 죽죽이란 말인가. 이에 대한 해답은 필자가 대충 엮어본 위 설화조의 글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대나무의 의인화(擬人化)를 통하여 죽령을 열었다는 옛 사람의 낭만성에 기인한 것이다. 또 옛 사람들은 풀뿌리와 나무껍질(草根木皮), 수렵에 많이 의지하여 목숨을 보전한 까닭에 현대에 사는 우리들보다식생의 이동 경로, 특징 등에 대해서 훨씬 박식하다.
한약이란 게 그렇지 않은가. 모든 풀뿌리를 다 캐서 먹어봐야 그 약효를 알 수 있는 것처럼, 그들의 의식주의 생활은 초근목피와 절대로 분리될 수가 없다.
그리하여 그들은 대나무 하나에도 다정다감하게 피가 돌고 살이 따뜻한 우리의 친구로 의인화시켜서 죽죽이 장군을 탄생시킨 것이다.
죽령 길을 개설한 것이 대나무 죽죽이였다고 얘기한다면 필자의 추리가 굉장히 큰 억설이 될까?
본 이야기는 단양군에서 2001년3월1일 재판 1쇄 펴낸 단양의 향기 찾아 에서 옮겨 적
은 글 임을 밝혀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