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伴鷗亭[반구정]

단양의 화통 2010. 10. 5. 14:42

 

坡州 伴鷗亭[반구정]

 

   黃喜 정승께서 말년에 갈매기와 벗 삼던 곳.

 

     자유로 당동I.C에서 나와 삼거리에서 좌회전하면 임진강변에서 伴鷗亭[반구정]과 厖村影堂[방촌영당]등 황희 정승의 유적지를 볼 수 있다.

 

     坡州市誌[파주시지]등에 따르면 伴鷗亭[반구정]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淸白吏[청백리]였던 黃喜[1363生~1452沒]정승이 1449년 영의정에서 물러나 말년을 보낸 곳이다.

 

     원래 임진강 기슭의 나루터인 洛河津[낙하진]과 가까워 洛河亭[낙하정]이라고 불렸다가 황희 정승께서 ‘짝 伴[반]’ 자와 갈매기 鷗[구]‘ 자를 써서 새로 이름을 붙였다. 풀어 쓰면 ’갈매기를 벗 삼는 정자’ 라는 뜻이다.  반구정 마을 주변 마을의 이름도 이 반구정의 이름을 딴 반구동이다.

 

    조선 중기의 유학자인 許穆[허목]은 伴鷗亭記[반구정기]에서 주변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그렸다. ‘매일 潮水[조수]가 나가고 뭍이 드러나면 흰 갈매기들이 날아드는데 들판과 모래사장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가득하다.’

 

    伴鷗亭[반구정]이 위치한 문산읍 沙鶩里[사목리]도 강 건너 모래벌판에 찾아오는 철새가 장관을 이룬 데서 유래한다.

 

    파주지역 문화연구소 이 윤희[44세]소장은 “坡州郡誌[파주군지]등을 보면 조선시대 임진강변에는 20개가 넘는 亭子[정자]가 있었다고 전 한다” 며 그 중에 현존하는 亭子[정자]는 花石亭[화석정]뿐이라고 말했다.

 

    임진강 상류 파평면 율곡리에 있는 花石亭[화석정]은 조선시대 성리학자인 율곡 이이 선생께서 제자들과 말년을 보낸 곳이다.

 

    600년이 지난 지금도 반구정의 풍경은 변함이 없다. 절벽 아래로 임진강은 유유히 흐르고 강 건너 장단평야가 넓게 펼쳐져 있다. 해질녘에는 해가 넘어가는 모습이 절경이다. 하지만 당시에 이곳을 찾았다는 갈매기는 그 수가 훨씬 줄었다. 이 윤희[44세]소장은 “생태계가 변하면서 갈매기 대신에 철새들이 임진강을 찾고 있다.” 고 말했다. 특히 장단평야에는 해마다 수백마리의 독수리 떼가 날아와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남북 분단으로 생긴 철책과 주변의 장어구이 집도 또 다른 모습을 연출한다.

 

     한국전쟁 때 불탄 伴鷗亭[반구정]은 1967년 후손들에 의해 다시 세워졌다. 당시 Cement로 지은 것을 1998년 목조 건물로 다시 지었다.

 

     伴鷗亭[반구정]바로 옆에 자리 잡은 仰止臺[앙지대]는 伴鷗亭[반구정]이 원래 있던 자리다. 1915년 伴鷗亭[반구정]을 지금의 자리로 옮기면서 황희 선생의 덕을 우러르는 뜻에서 육각정을 짓고 仰止臺[앙지대]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伴鷗亭[반구정]아래에는 황희선생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厖村影堂[방촌영당]이 있다.

 

     1452년[문종2년]황희선생이 89세로 세상을 뜨자 1455년[세조1년]유림들이 황희선생의 호를 따서 지은 사당이다. 이 건물도 6.25 전쟁에 불탔다가 1962년 후손들이 다시 세웠다.

     1976년 경기도 기념물 제29호로 지정됐다.

 

 

조선일보 제27912호


2010년 09월 24일 금요일 51판 A27면

우측 상단의

최 종석 기자 comm@chosun.com


우리동네 지명유래[29]에서


의정부 집에서


단양의 화통 /6K2FYL. 신 영섭

2010년 09월26일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