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산신씨 신성부원군파 21대손의
효자 할아버지
[申 孟자慶자]효자비!
평산신씨 장절공 시조 할아버지로부터
21대손에 해당하시는 효자 할아버지[신 맹경]께서는
信城府院君[신성부원군] 申 贊[신 찬] 할아버지의 7대손이 되십니다.
충북 단양에서 태어나시어 단양에서 돌아가셨으며
자세한 이야기는 추후 마련하여 또 올려 놓도록 하겠읍니다....
본 비문은 우암 송시열 선생님께서 쓰시었다.
효자 할아버지[신 맹경]
비문 글씨[우암 송시열 씀]
우선 사진부터 올립니다....
2010년 05월 07일 촬영하여
05월 11일 등재....
비각 내에 봉안되어진
효자 할아버지의
비석 전체 모습이나
조금 미흡한 듯하여.......
상단부와 중단부....그리고 하단부로 나누어 우선 촬영하여서......
상단부의 비문 내용입니다.
중단부 비문 내용입니다.
하단부 비문 내용입니다.
운계공 효자 할아버지
신 맹경 어른님의 내역은 작성되는 데로 준비하여
또 등재하겠읍니다.
신맹경 효자각[申孟慶 孝子閣] : 평산신씨(平山申氏) 24대손 신맹경의 효성을 기리는 비각.
신맹경은 명종 5년[1,550]에 태어나 효성이 지극하여 단양군수 서인원이 조정에 알려
선조26년[1593]정려됨.
벼슬은 제천 현감을 지냈고 비는 숙종11년(1,685)에 세워짐.
우암 송시열이 짓고 곡운 김수증이 씀.
단양 ; 신 맹 경 정 려 비
사람을 사람답게 섬기던 사람
명칭 ; 신맹경 정려비
소재지 ; 충북 단양군 단성면 북하리
시대 ; 조선시대
충북 단양군 단성면 북하리에는 조선시대의 문신 신맹경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신맹경 정려비가 있다. 신맹경은 1,550년[명종 5]에 태어났는데 살아 있을 때 효행이 지극했을 뿐만 아니라 주변의 사람을 돌아보는 등 인품이 뛰어났다. 그의 행실은 『삼강속록[三綱續錄]』에 기록 되었다.
신맹경은 아버지가 종기를 앓자 그 고름을 직접 빨아내었으며, 숙환[宿患]을 앓자 언제나 그 침상을 지키며 밤낮으로 곁을 떠나 지 않았을 뿐더러 옷을 벗고 자지 않았다.
그렇게 지내기를 10여 년 동안 하였는데 마치 10년을 하루같이 한결같은 정성이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적에는 여묘[廬墓]살이를 하면서 3년 동안 죽만 먹었다.
어머니가 병들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모친의 병에는 고슴도치 고기가 특효입니다.” 의원의 말을 들은 신맹경은 황급히 고슴도치를 구해서 어머니께 올렸더니 병이 나았다. 또 한 어머니에게 약을 드릴 때는 손가락의 피를 내어 약에 섞어 드리기도 했다.
이준이 쓴 『단양지[丹陽誌]』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나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3년 동안 몸이 마르도록 슬퍼하였고 소금기가 들어간 채소를 먹지 않았으므로 거의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어머니가 병들었을 적에는 매번 대변을 맛보고 증세를 살폈으며, 참봉[參奉]이 되었지만 노모[老母]의 봉양[奉養]을 위해 출사[出仕]하지 않았 다. 또한 더욱 우애하는데 독실하였다.”
다른 사적에 보면 신맹경은 사위가 과거에 급제하고 영광스럽게 귀향하여 찾아왔지만 문을 닫은 채 만나보지 않은 적이 있었다.
그 이유는 사위가 광해군 때 폐모[廢母]를 주장하는 상소[上疏]에 가담한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신맹경은 그처럼 효를 중요한 가치로 생각했다.
한번은 시골 농장에 있는 젊은 여자가 신맹경을 연모하자 그녀의 어머니가 공을 찾아왔다. “딸이 공을 연모하는 마음이 깊어 공께 바치고자 하니 받아주십시오.” “바른 도리에 어긋난 여색을 취함은 선비의 도리가 아닐세. 어찌 날더러 도리에 어긋난 인연을 맺으라 하는 것인가?”
신맹경은 매우 엄하게 거절하고 여자를 돌려보냈다. 또한 1,593년[선조 26]과 1,594년[선조 27]에 걸인들이 문 앞에 가득하자 그들을 위해 죽을 쑤어 일일이 먹였다는 기록이 있다.
걸인들 가운데 나이 어린 계집종이 둘 있었는데, 공은 그들의 말씨와 모습을 범상치 않다고 여기고 집안에 거처하게 하면서 노복들로 하여금 접근하지 못하게 하였다.
후에 알아보니 그 처자들은 과연 양반의 후손이었다. 이처럼 신맹경은 효심이 깊었을 뿐만 아니라 매사에 성품이 곧고 사람의 도리를 귀하게 여겼다.
효자로 알려져 효자비가 세워졌지만 그의 인품은 효를 넘어 인간에 대한 것이었다.
효가 모든 행실의 근본이 됨을 삶으로 보여준 인물이었다. 나라에서 정려비를 세우다
신맹경의 효행에 대해 단양군수 서인원이 상소하자 조정에서는 ‘서부참봉’의 자리를 내렸는데 신맹경은 모친 봉양을 위하여 사양하였다.
그 후 1,593년[선조26]조정에서 그의 효행을 기려 정려를 내렸다. 또한 그가 죽은 후 1,685년[숙종 11]에는 정려비가 세워졌다.
정려비에는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효자 통훈대부 행제천현감 충주진관병마절제도위 신맹경 정려[孝子 通訓大夫 行堤川縣監 忠州鎭管兵馬節制都尉 申孟慶旌閭)” 뒷면에는 그의 효행이 잘 기록되어 있는데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글씨는 김수중이 썼다.
또한 단양군 단성면 북하리에 신맹경을 배향하기 위한 단계사[丹溪祠]가 건립되었는데 고종 때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
훼철된 건물은 충주 댐 수몰로 헐리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 후 1,972년 평산 신씨 신우균의 주도로 단계사의 옛터에 다시 서원을 복원하여 도계서원[道溪書院]으로 개칭하였다. 이 서원의 이름은 시조 인 신숭겸을 모시는 춘천의 도포서원의 도[道]자와 단계사의 계[溪]에서 한 글자씩 따서 붙인 것이다.
도계서원에는 중앙에 신숭겸의 위패가 있고, 좌우로 여덟 명의 위패를 봉안하여 연 2회에 걸쳐 후손들이 제향을 올리다가, 2,003년 10월에 마지막으로 향사하고 헐려져서 현재는 터만 남아있는 상태이다.
직접 관련된 유적[물] ; 신맹경 정려비
간접 관련된 유적[물)] ' 도계서원지
2010년 05월10일
충청권 문화유산과 그 삶의 이야기 - 단양 P483 ~ 486r까지
자료 복사하여
충북 단양군 단성면 북상리 72번지
단양의 화통 본가에서
단양의 화통 / 6K2FYL. 신영섭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