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통의 이야기

[이덕환의 과학세상] ‘서양 은’으로 둔갑한 알루미늄

단양의 화통 2020. 4. 20. 21:04


[이덕환의 과학세상] ‘서양 은’으로 둔갑한 알루미늄

2020.02.05 14:00

                   
고열을 이용해 순간적으로 끓인 양은 냄비의 라면을 옮겨 담고 있는 모습이다. 연합뉴스 제공


한 남자가 고열을 이용해 순간적으로 끓인 양은냄비의 라면을 옮겨 담고 있다.
연합뉴스 제공


     "도대체 ‘양은’(洋銀)이 뭡니까?" 어느 중진 과학기자가 던진 질문이다. ‘양은’(洋銀) 냄비에 라면을 끓이면 알루미늄이 녹아나온다는 제보를 받았다는 것이다. 양은을 구리·니켈·아연의 합금이라고 소개하는 백과사전을 상식이라고 믿었던 입장에서는 몹시 난처한 질문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양은 주방용품들은 처음부터 백과사전에서 소개하는 구리 합금이 아니라 음료수 캔이나 자동차 휠에 사용되는 첨단 소재인 ‘알루미늄’으로 만든 것이었다. ‘양은’(洋銀)이라는 이름은 새로운 주방용기를 개발한 제조사들이 마케팅을 위해 붙여준 국산 이름이었다. ‘양은’(洋銀)의 상징인 노란색도 알루미늄 표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제조사들이 선택했던 염료의 색깔이었다.


 

주방문화를 완전히 바꿔버린 ‘양은’(洋銀)

 

선학 알미늄이 만든 양은 도시락. 60년대 '양은'이라는 신소재가 등장하고 주전자, 솥, 도시락, 후라이팬 등이 쏟아져 나왔다. '양은'은 기존의 무쇠솥과 달리 열 전도가 잘 됐다. 출처미상.

선학 알미늄이 만든 양은 도시락이다. 60년대 '양은'이라는 신소재가 등장하고
주전자, 솥, 도시락, 후라이팬 등이 쏟아져 나왔다.
'양은'은 기존의 무쇠솥과 달리 열 전도가 잘 됐다.
출처미상.



    일주일을 1달러로 견디던 힘든 시절 우리가 생활에 사용하던 소재(素材)는 극도로 제한적이었다. 개다리소반을 만들던 목재, 가마솥·번철(燔鐵)에 쓰던 무쇠, 밥상에 올리던 그릇에 사용하던 놋쇠와 사기, 간장·된장을 넣어두는 옹기를 만들던 진흙이 고작이었다. 주부들에게는 무겁고 잘 깨져서 불편한 소재이지만 대안이 없었다.


    이런 부엌의 모습을 완전히 바꿔놓은 것이 바로 1960년대에 등장해 ‘양은’(洋銀)으로 불리던 신소재였다. 무쇠나 놋쇠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벼웠고, 찌그러지기는 하지만 사기처럼 쉽게 깨지지도 않았다. 주부들에게는 꿈에서나 그리던 기적의 신소재였다. ‘양은’(洋銀)으로 만든 주전자·솥·대접·양푼·쟁반·밥상·도시락·후라이팬이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소비자들이 ‘양은’(洋銀)을 쓸 수밖에 없던 진짜 이유는 정작 따로 있었다. 도시의 가정에 새로운 연료로 공급되기 시작한 연탄이 문제였다. 장작의 자리를 차지한 연탄의 약한 화력으로는 크고 무거운 무쇠 솥이나 번철을 충분히 달굴 수가 없었다. 가볍고, 열전도가 잘 되는 ‘양은’(洋銀)이 꼭 필요했다. 


     ‘양은’(洋銀)의 인기는 대단했다. 반짝이는 ‘양은’(洋銀)으로 만든 주전자와 대접이 탁배기(막걸리)를 즐기던 사람들의 옹기 호로병과 사발을 밀어내 버렸다. 새로 등장한 인스턴트 라면을 큼지막한 가마솥에 끓일 수도 없었다. 라면은 역시 ‘양은’(洋銀)냄비에 끓어야 제 맛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부러진 상다리를 헝겊으로 붙들어 매고, 반쪽짜리 놋쇠 숟가락도 함부로 버릴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웠지만 ‘양은’(洋銀)은 거부할 수 없는 새로운 생필품이 돼버렸다. ‘스텐’(STS ; Stain Less Steel)과 ‘플라스틱’이 등장한 것은 그 후의 일이었다.


 

경금속 산업의 성과

 


남선경금속공업주식회사 당시의 전경이다. SM 남선알미늄 홈페이지 캡쳐


남선경금속공업주식회사 당시의 전경이다.
SM 남선알미늄 홈페이지 캡쳐



     주방의 풍경을 완전히 바꿔놓은 ‘양은’(洋銀)은 사실 해방 직후 대구에서 어렵게 출발한 경금속 산업의 성과였다. 비철(非鐵)금속 제품을 개발해왔던 기업들이 대표적인 경금속인 알루미늄으로 만든 얇은 판재(板材)를 압출(壓出)해서 주방용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남선경금속선학알미늄이 선두주자였고, 남선알미늄의 ‘거북선표’가 특히 유명했다.


    당시의 소비자에게 알루미늄은 몹시 낯선 소재였다. 교과서에서도 ‘알루미늄’을 ‘알미늄’이라고 부르던 시절이다. 새로운 주방용품을 개발한 제조사들이 절묘한 마케팅 전략을 찾아냈다. ‘서양의 은(銀)’이라는 뜻의 ‘양은’(洋銀)은 그렇게 등장했다.


     1970년대의 아파트에서 ‘알루미늄 새시’를 쓰면서 알루미늄이 제 이름을 되찾게 됐다. 그러나 주방용기에서는 아직도 ‘양은’(洋銀)이 대세로 남아있는 모양이다.


    알루미늄은 지각의 8%를 차지하는 비교적 흔한 경금속이다. 대부분 ‘보크사이트’(철반석)라는 광석 속에 산소와 단단하게 결합한 상태로 존재한다.

    보크사이트에서 화학적인 방법으로 알루미늄을 환원시키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렵다. 그래서 알루미늄이 금·은·백금보다 훨씬 비싼 귀금속으로 대접을 받았다.

    나폴레옹 3세는 왕관의 끝을 알루미늄으로 장식했고, 귀한 손님들에게는 알루미늄으로 만든 접시와 술잔을 내놓았다. 미국도 국력을 자랑하기 위해 국회의사당의 돔과 워싱턴 기념비의 꼭대기를 알루미늄으로 치장했다.


    그런 알루미늄을 누구나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은 역시 기술 혁신 덕분이었다. 미국의 찰스 홀과 프랑스의 폴 에루가 22살이었던 1886년에 독립적으로 새로운 제련법을 개발했다. 보크사이트를 섭씨 950도로 가열해서 녹인 용액을 전기분해하는 ‘홀-에루 제련법’ 이다.

    그러나 지금도 알루미늄의 생산에는 엄청난 양의 전기가 소비된다. 미국은 전력 소비량의 5%를 알루미늄 제련에 쓴다. 알루미늄의 재활용을 절대 외면하지 말아야 하는 중요한 이유다. 현재 전 세계에서 사용하는 알루미늄의 70%가 재활용된다. 우리는 알루미늄 잉곳[Ingot]을 전량 해외에서 수입한다.

 



양은 주방용품의 소재로 쓰인 알루미늄. 위키피디아 제공

‘양은’(洋銀) 주방용품의 소재로 쓰인 '알루미늄'.
위키피디아 제공




    백과사전에서 ‘양은’(洋銀)은 구리에 니켈과 아연을 20%씩 넣어서 만드는 은백색의 합금이다. 19세기 독일 화학자들이 개발해서 ‘독일 은(銀)’(german silver)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양백’(洋白)이라고 불렀다. 진짜 알루미늄보다 훨씬 무겁지만, 기계적 성질이 뛰어나고, 부식과 열에 잘 견디기 때문에 다양한 용도로 사용된다. 식탁에서 사용하는 스푼·포크·접시나 반지·팔찌·목걸이와 같은 장신구를 만드는 데에도 사용된다.

    일본에서는 ‘양은’(ようぎん, ‘요긴’)이 다양한 용도로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17세기 청(淸)에서 개발된 구리‧니켈의 합금인 ‘백동’(白銅)을 요긴이라고 불렀고, 메이지유신 무렵 들어왔던 스페인과 멕시코의 은화(銀貨)를 뜻하는 ‘양은전’(洋銀錢)의 줄임말로 쓰기도 했다. 

 

     알루미늄으로 만든 냄비에 신맛이 나는 화학적으로 산성인 재료를 넣고 끓이면 적은 양의 알루미늄이 양이온으로 녹아나오는 것이 사실이다. 검게 변색된 은 숟가락이 알루미늄 때문에 전기적으로 환원되어 깨끗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두려워할 이유는 없다.


     우리가 섭취하는 거의 모든 식품에는 미량의 알루미늄이 들어있다. 흙속에 들어있는 알루미늄 때문이다. 그러나 알루미늄의 생리적 기능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렇다고 확실한 독성이 알려져 있는 것도 아니다.

    음식이나 호흡을 통해 몸속으로 들어온 알루미늄은 대부분 신장을 통해 배출되어버린다.  ‘양은’(洋銀) 냄비에서 녹아나온 알루미늄도 마찬가지다.


     알루미늄이 치매를 일으킨다는 주장은 과학적으로 분명하게 확인된 사실이 아니다. 미국 환경보호청(EPA)은 신장 기능에 문제가 없으면 알루미늄을 크게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고 확실하게 밝히고 있다.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해주는 양은 냄비를 애써 멀리할 이유는 없다는 뜻이다. 백과사전도 바로 잡아야 한다.



 

우리가 섭취하는 거의 모든 식품에는 미량의 알루미늄이 들어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우리가 섭취하는 거의 모든 식품에는 미량의 알루미늄이 들어있다.
게티 이미지뱅크  제공



※필자소개

 

이덕환 ; 서강대 명예교수(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대한화학회 탄소문화원 원장을 맡고 있다. 2012년 대한화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과학기술‧교육‧에너지‧환경‧보건위생 등 사회문제에 관한 칼럼과 논문 2500편을 발표했다.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 《거의 모든 것의 역사》를 번역했고 주요 저서로 《이덕환의 과학세상》이 있다. 


2020년 04월 20일



충북 단양의 장촌말 집에서

단양의 화통 /  6K2FYL 신영섭이가


동아사이언스

[이덕환의 과학세상] ‘서양 은’으로 둔갑한 알루미늄

2020.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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