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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溪 朴世堂 先生에 對하여[서계박세당 선생에 대하여]

단양의 화통 2010. 4. 3. 16:44

 

시대를 초월한 지성

서계 박 세당 선생.

 


生 ; 1629년 08월 19일 남원 관아에서 錦州君[금주군]박 정 과 윤씨

      의 4남으로 탄생.

歿 ; 1703년 08월 21일 正寢[정침]에서 考終[고종] 10월 25일 장례.

 

 


     여기 시대를 초월해 살았던 한 지성인이 있으니, 서계 박 세당 선생이 바로 그 사람이다.

 

      綺紈子弟[기환자제]로 태어나 문과에도 장원한 서계는 한때 관료로서 탄탄대로를 달리며 세상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지만 타협과 쟁론을  일삼는 仕宦[사환]을 천직으로 여기지 않았다.

      학자로 돌아오기까지 10년의 모진 풍상이 뒤따랐고, 불혹의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세상의 영욕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었다.

 

      이때 서계가 찾은 곳이 수락산 석천동이었다.

      아버지 錦州君[금주군]의 유업이요, 먼저간 의령 남씨의 유혼이 깃든 석천동은 풍광도 빼어 났지만 서계에게는  더할데 없이 아늑한 정신적 고향이었다.

 

      낮에는 재야 경세가로서 적삼에다 땀을 묻히며 채전을 일구었고, 밤이면 삼간 초옥에서 학문에 열중하며 학인으로서의 냉철함을 가다듬었다.   치밀한 현장실습의 경험을 담은 색경은 농부들과 고락을 같이하며 체화된 애민사상의 구체적 실천이었고, 사변록은 기존 학풍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었다.

 

     주자학을 신봉하던 당시의 사상계는 서계의 학문적 태도와 사변록을 결코 용인할 수 없었다.   이에 서계에게는 사문난적이란 올가미가 씌워졌고, 옥고 사변록도 조목조목 변파되어 잿더미로 변했다.    그러나 서계는 서울로 압송되어 대죄하는 순간까지도 자신의 학문적 소신을 굽히지 않았고,  손수 지은 묘표에다 "어떤 시련에도 세상에 고개를 숙이거나 소침해 하지 않았다" 고 자신있게 썼다.

 

     그랬다.  서계의 학문은 文弱[문약]의 시대가 낳은 학술의 유희가 아니라 대장부적인 기상에 바탕한 한 지성의 소신이었던 것이다.  비록  서계의 학문은 그 당대에는 빛을 보지 못했지만 시대를 초월하는 지성과 실천에 바탕한 애민 사상은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채 소중한 정신유산으로서 면면히 전해져 왔다.

 

     이제 서계의 학문은 주자학의 굴레가 아닌 현대적 관점에서 새롭게 조명되고 있고, 특히 2003년 08월에는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어 학술 행사와 현양 사업이 이루어짐으로써 서계의 참 모습이 친근감 있게 다가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의정부 장암동 197번지에 있는 서계문화재단에서는 이러한 추세에 발맞추어 다양한 문화, 학술 행사를 통해 선생의 정신세계가 바르게 이어지는데 앞장서고, 그러한 활동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소중한 교훈이 될 수 있는 길을 모색해 가고자 한다.....

 

 

 

綺紈子弟[기환자제] ; 비단옷을 입고사는 귀족가문의 자제.

仕宦[사환] ; 벼슬하다.

 

 

 2010년 04월03일


수락산 산행 함께 한 6K2GHT & 6K2FYL..........

그리고 예비 아마추어 무선사로서 Origin Y.L 하나 포함 총 3명이서

 

수락산 정봉에서

석림사 방향 하산길에 내방하며


장암역 근처에서 탐방함

 

 

 

 

 

혹 탈자나 오자 발견시 통보주시면 곧 수정토록하겠읍니다.


서계문화재단에서 발행한

시대를 초월한 지성 박 세당 리플렛에서


2010년 04월 03일 옮겨 적음

 

참고 ; 서계문화재단  리플렛.

경기. 의정부시 장암동 197번지

Tel ; 031- 836-8600    Fax. ; 031-872-8603

http ; www.seogye.com

 



또한 묘소는 원형 타입이 아니고


사각형의 기단석으로 만들어진

특이한  구조였으며


서계선생을 포함하여

정경부인 2분을 좌 & 우로  합봉한 구조의 봉분입니다.


 내방하시면 문화 해설사로부터

자세한 설명 들으실 수 있음을 알려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