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통의 이야기

용담유사, 단양 동학 농민운동 이야기

단양의 화통 2018. 5. 14. 10:26



용담유사

단양 동학 농민운동 이야기


동학과 의병활동

    동학의 초창기이던 1863년, 전국에 16개 접이 있을 때 단양 지역이 포함되었으며 당시 접주는 민사엽이었다. 또한 해월 최시형은 남면 샘골[대강면 남천리]여규덕[몽양 여운형의 큰할아버지]의 집에서 1881년 용담유사를 간행하였다. "사람이 곧 하늘이다" 는 동학사상의 영향을 받은 까닭인지 불의에 대한 의분을 누리지 못하고 한말 의병활동이 거세게 일어났던 지역이 바로 우리 단양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의병 활동에 참여했으며, 전투 또한 단양의 곳곳에서 일어났다. 대표적인 인물로 영춘 남천 출신의 의병장 김상태가 있다.

영춘 남천 출신의 의병장 김상태, 해월 최시형




     동학을 동학 농민전쟁, 동학혁명, 동학 농민운동이라고 한다. 단양에는 단양의 접주 민사엽이 충주, 청풍, 동학군과 합세하여 186대 단양군수였던 정의동의 관사와 군청을 습격하여 군수를 축출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1981년에는 유명한 용담유사가 단양땅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단양 사람으로서 그렇게 아는 사람이 그리많지 않다.















     용담유사1881년 충청도 단양 남면 샘골[대강면 남천]여규덕, 정기현의 집에서 만들었다 고 기록되었다.

    이렇게 활발한 동학운동에 당시 교주였 던 최시형이 가산의 정석현씨 집에서 3년간 머슴살이를 하면서 동학을 하다가 쫓겨갔다고 했다.


    그 지점이 바로 현재 가산1리 삼거리 산쪽이다. 강경재는[강수]영춘 의풍과 동대에 은거하면서 어상천면 율곡리, 제천, 청풍, 영월쪽까지 동학운동을 했다고 한다.


    전라도에서 시작된 동학이 단양에 정착한 것은 태백산맥, 소백산맥 즉 양백지간 10승지를 저항의 거점지로 하면서 세력을 확장하려고 했던 것이다.

    최시형의 부인 손씨가 단양 옥에 갇히자 최시형이 도주하는데 가산, 남조, 남천, 동대, 의풍으로 간다.

    베틀재 노루목의 사기막골에 동학의 최고 책임자인 최시형의 처가집이 있어 이곳에 머문다. 이때에 박용걸, 박용한 후손 박영남[의풍리에 살다가 영월로 이주함 ]집에서 옷을 갈아 입고서 영월 하동으로 갔다고 하며 이때 도인[천도교인]권지하, 김연수가 안동김씨를 소개했다고 했으며 고종 22년[1885년]심상훈 체포 강한주를 데리고 피신. 이때에 단양사람으로 을미년에 영춘의 안영한[57]단양의 임재수[74]가 10년씩 구형되었다고 전하고 있으나 고종 32년[을미 1895] 개국 504년 3월 판결문[별표]에는 杖一百徒 3년에 처한다 했고 단양사는 임재수[74]는 杖一百流 三千里에 처하노라 하고 판결 선고 되었다.


    동학을 하는 사람은 다 쫓겨가고 집안도 가버렸다. 극형에 처한 성두한의 가족을 알아 보려고 의풍리에서 면담을 했으나 일본인의 혹독한 처벌 그후 의병 난리에 일본인의 분풀이 학정, 6.25사변 때 인민군의 사단본부가 주둔하면서 철수시 저지른 만행, 국군이 점령하면서 부역자의 보복 등 3중 4중 피해 받은 곳이기에 모두가 확실한 신분이 아니면 이야기 하지 않고 취중이 아니면 본심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성두한의 가족중 성대호[생존117세, 서낭골 거주]를 중심으로 성종우를 추적했으나 6.25때 호적은 멸실되었고 토지대장에 의풍리 산 69번지에 성두호 연명대장[1918년]을 추적 탐문하였으나, 찾을수 없고 사기막골에 살던


박씨 : 박경남[영월로이사 김성낙<오목에 살고 있음 82세>]
김씨 : 김기근, 태복[중원면 산척리 거주] - 손종국[와곡거주] - 사육신 난리 때 - 피신[김문기 병조판서의 후손]
신씨 : 신승균[청주로 이사] - 신보현[망]로만 파악되였다.


     둘째는 동학농민과 공모하여 정권 장악을 기도했다는 대원군 손자 이준용[李竣鎔], 청군을 불러들였던 민씨 세도가의 핵심 민영준 등에 대한 형사판결문은 동학농민들이 전개한 일련의 개혁운동이 당시의 정치적 역학관계를 결정적으로 변화시키는 원동력이었다는 점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셋째는 1894년 3월부터 1895년 초까지 걸쳐 활동했던 동학 농민들이 관군과 일본군에 의해 진압된 후에도, 1900년대에 서정만[徐定萬]등이 속리산을 중심으로 계속하여 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운동에는 1894년 5월에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었던 경북지방의 농민들이 대거 참여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1894년 이후에도 동학 농민들의 활동은 계속되어 1904년 천도교로 발전해 가는 과정을 밝히는 실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넷째는 민사 판결문의 내용들은 소위 탐관오리[貪官汚吏]의 부패상과 일반인들의 이권분쟁 실상을 밝혀주고 있지만 이를 통해서 당시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수준을 파악해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즉, 모든 분쟁의 원인은 상품, 화폐 경제의 발전에 기인하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당시 우리나라는 근대적 개혁을 통해서 자본주의적 경제체제로 나아가야 할 상황이었다는 점을 반증해 주고 있다.


    다섯째는 손병희와 그의 제자로서 일진회 회장이 된 이용구가 원산의 "윤영창[允泳昌]"객주회사 소유권을 둘러싸고 벌인 민사재판은 천도교와 일진회의 재정기반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중의 하나이다. 이 객주회사는 손병희가 일본에 망명 중인 상황에서 1902년 무렵에 그의 동생 손병흠[孫秉欽]을 시켜서 창설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섯째 갑오개혁 정권이 설치한 재판소는 재판장을 법부대신이 맡는 등 형식은 근대적 체계를 갖추었지만, 형법은 아직도 전근대 사회의 법률인 대명률[大明律]과 대전회통[大典會通]이었다는 점이다. 판결문을 통해서 우리지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동학운동을 하였으나 폐쇄된 시기 가문과 씨족 관념이 확실한 조상들 속에 면면히 근대 사회로 나가는 과도기었음을 엿볼 수 있다. 우리 지역의 많은 자료가 나왔으면 한다.


    특히 교주였던 최시형이 3년간 가산에서 머슴을 살면서 동학을 하였고 교주 최시형의 처가집이 영춘 의풍 사기장골이라서 십승지와 화전민, 산악을 중심으로 한 많은 동학이야기가 있을텐데 나오지 아니함이 아쉽다.


    동학→의병→6.25로 이어지는 항쟁사는 단양이 가지고 있는 숙제 거리이며 언제고  한번은 다루어야 할 지역현안 사업이다.

갑오 3월 27일 오남창의대장소 재백산

격 문[1894년 음 3월 27일]

    우리가 의를 들어 이에 이르름은 그 본의가 결코 다른데 있지 아니하고 창생을 도탄의 중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 두고자 함이라.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이 무리를 구축코자 함이라.
양반과 부호의 앞에 고통을 깊은자라.
조금도 주저치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하여도 미치지 못하리라.

동학군 4대 강령[1894년 음 3월 25일]

  1. 사람을 죽이지 말고 가축을 잡아먹지 말라.
  2. 충효를 다하고 제세안민하라.
  3. 일본 오랑캐를 축멸하고 성도를 깨끗이 하라.
  4. 군대를 몰고 서울로 들어가 권귀를 진멸 하라.

동학군 12개조 기율[1894년 음 4월]

  1. 항복한 자는 대접한다.
  2. 곤궁한 자는 구제한다.
  3. 탐욕한 자는 추방한다.
  4. 순종하는 자는 경복한다.
  5. 도주하는 자는 쫓지 말라.
  6. 굶주린 자는 먹인다.
  7. 간활한 자는 없애 버린다.
  8. 가난한 자는 도와준다.
  9. 불충한 자는 없애 버린다.
  10. 거역하는 자는 효유한다.
  11. 병자에게는 약을 주라.
  12. 불효한 자는 죽인다.



2018년 05월 14일


충북 단양의 투구봉 주유소에서

단양의 화통 / 6K2FYL. 신영섭


www.dy21.net 사이트의


행복한 단양

고을 설화 단양읍편


"단양 동학 농민운동 이야기"를

재 각색하여 올림.




용담유사[龍潭遺詞]

       

    조선 후기에 최제우[崔濟愚]가 지은 포교가사집[布敎歌辭]


용담유

동학의 교조 최제우가 1860년(철종 11)에서 1863년에 새로운사상에 의한 교훈을 펴려고 지은 글.

내용

한글본.


     1860년[철종 11년]에서 1863년에 걸쳐 지었다. 수록 내용은 용담가[龍潭歌] 안심가[安心歌] 교훈가[敎訓歌] 몽중노소문답가[夢中老少問答歌] 도수사[道修詞] 권학가[勸學歌] 도덕가[道德歌] 흥비가[興比歌] 검결[劍訣]의 9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수운행록 水雲行錄≫에 의하면, 이 ≪용담유사≫는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처사가 處士歌>를 포함하여 모두 10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용담유사≫는 1881년 6월 충청북도 단양군 남면[대강면] 천동 여규덕[呂圭德]의 집에서 최시형[崔時亨]에 의하여 처음 간행되었고, 그 뒤 1893년과 1922년 각각 목판본으로 다시 간행된 바 있다. 이때 <검결>은 정치적 이유로 인하여 함께 간행되지 못하였다.


    ≪용담유사≫는 한문으로 된 ≪동경대전 東經大全≫과 더불어 동학의 기본경전이다. 최제우는 그가 깨친 후천 개벽사상을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따를 수 있도록 국문으로 쓰고, 가사의 형식을 빌려 표현하였던 것이다. 각 편의 내용과 특징을 개략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용담가 : 1860년 득도한 바로 그 해에 지은 가사이다. 전체가 4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2음보 1구로 모두 144구로 되어 있다. <용담가>는 조상 때부터 지켜내려왔고, 또 최제우 자신이 태어나서 자랐으며 득도하였던 경주 구미산 용담의 아름다움과 득도의 기쁨을 노래한 가사이다. 용담의 산의 형세와 물의 형세가 아름답고 절묘함을 노래하였으며, 신라 때 우리 문화를 찬미하면서 득도하게 된 내력과 그 기쁨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이 <용담가>에는 당시 일반 민중간의 사회적 통념으로서의 풍수지리사상과 가계 존중의 문벌 충효의식이 강하게 부각되어 있다. 운율의 흐름과 변화 있는 언어의 구사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2) 안심가 : 1860년에 발표한 가사이다. 2음보 1구로 총 290구로 되어있다. 이 <안심가>는 그 당시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또는 종교적으로 불안해하던 부녀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하여 지은 노래이다. 이 가사에서 최제우는 득도한 뒤 하늘에서 물형부[物形符 : 최제우가 영감을 받아 천신을 그린 천주교도의 영부]를 받아 이를 그린 종이를 먹고 신선과 같은 풍채와 골격을 갖추게 된 자신을 서학[西學]을 한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을 비판하였다. 그 뒤, 왜적에 대한 적개심을 토로하면서 자신이 곧 왜적을 쓸어버리고 우리나라의 운수를 보전할 몸임을 밝히고, 따라서 부녀자들은 안심하라고 설득하고 있다. 특히, 이 가사에서 최제우는 천대받던 이 나라의 부녀자들을 현숙하고 거룩하다고 떠받들면서, 춘삼월 호시절의 태평가를 함께 부를 주체로 설정하고 있다. 선각자다운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는 부분이다.


(3) 교훈가 : ≪수운행록≫·≪천도교창건사≫ 등에 의하면 1860년에 이루어진 것으로 되어 있으나, 최제우가 득도한 이듬해인 1861년에 이루어졌다는 주장도 있다. 2음보 1구로 총 448구로 된 장편가사이다. 자손들에게 내리는 교훈형식으로 된 이 가사는, 고향의 교도들에게 힘써 수도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곧,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을 그의 몸에 이미 모시고 있으므로, 하늘 조화의 그 참된 마음을 고이고이 삼가 지켜 이를 공경하고 믿는 데서 창조의 바른 기운을 되살려낼 것을 당부한 것이다.


(4) 몽중노소문답가 : ≪수운행록≫에 의하면 1861년에 지은 것으로 되어 있고, ≪천도교사 天道敎史≫에는 1862년에 지은 것으로 되어 있다. 총 4장으로, 2음보 1구로 총 169구로 이루어져 있다. “삼각산 양도읍 년 지늰 후의 원갑 이 세상”에 자식이 없던 두 늙은이가 금강산에 들어가 산신께 빌어 옥동자를 얻었다. 이 아이는 ‘군불군[君不君]’·‘신불신[臣不臣]’·‘부불부[父不父]’·‘자부자[子不子]’의 난세를 한탄하고, 천하를 두루 다니다가 고향에 돌아와 백가시서[百家詩書]를 외웠다. 그러다가 다시 고향을 떠나 금강산 상상봉에 올라 쉬다가 꿈속에 한 도사를 만나 깨우침을 얻는다는 내용이다. 이 가사는 최제우의 출생·성장·득도과정·득도내용 등을 요령 있게 잘 설명하고 있다. 득도의 내용은 다음 구절에 집약되어 있다. “십이졔국 괴딜운수 다시 벽 안일넌가 평성세 다시 졍민안 거시니 탄지심 두지 말고 지나셔라 원갑 지나거든 상원갑 호시졀의 만고업 무극도 이셰상의 날거시니.”라는 도사의 깨우침이 그것이다.


(5) 도수사 : 1861년에 지은 가사로, 2음보 1구로 총 200구로 되어 있다. 득도한 뒤 고향에서 여러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나, 제자들에게 수도하기를 간곡히 당부한 것이다. 즉, “셩경이 디켜 닥가면 무극도 안일넌가 시호시호 긋오면 도셩입덕 안일넌가.”라고 하면서, 제자들이 자신이 전한 연원도통[淵源道統]을 지키면서 성[誠]과 경[敬]으로 도를 닦기를 당부하고 있다.


(6) 권학가 : 남원읍 서쪽 10리 밖 교룡산성 안에 정하였던 은적암[隱寂庵]에서 임술년[1862] 새해를 맞이하면서, 각지 제자들에 대한 정회[情懷]를 가눌 길 없어 지은 가사이다. 2음보 1구로 총 228구로 되어 있다. 최제우 자신이 자각창도[自覺創道]한 동학을 믿음으로써 다 같이 한울님의 참뜻으로 돌아가 한 몸 같이 될 것을 권유한 노래이다. “성지우성[誠之又誠] 공경해서 한울님만 공경하소.”, “성경이자[誠敬二字] 지켜내어 한울님을 공경하면 자아시[自兒時] 있던 신병[身病] 물약자[(勿藥自效] 아닐런가.”라고 노래한다. 이어서 어질고 뜻있는 사람 만나거든 시대의 운수와 변화를 의논하며, 백년의 신세[身勢]를 말하거든 이 가사를 주고 결의해서 가르침을 존중하도록 하라는 등의 내용으로 되어 있다.


(7) 도덕가 : 1863년 7월 경주 현곡면 등지에서 순회 설법하던 당시에 지은 가사로, 2음보 1구로 총 136구로 되어 있다. 지벌[地閥]과 문필[文筆]보다는 도덕의 귀중함을 깨우친 노래이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조화를 자각 실현함에 있어서 소중한 것은 내 몸에 이미 모시고 있는 하느님에 대하여 공경하고 두려워 하는 마음이니, ≪대학≫·≪중용≫의 종지[宗旨]로서 천명된 성경이자[誠敬二字]가 그것이요, ≪주역 周易≫의 문언전[文言傳]에 언급된 바 천지와 더불어 그 덕을 합하기를 강조함이 그것임을 깨우쳐 주고 있다.


(8) 흥비가 : 1863년에 지은 가사로, 2음보 1구로 총 184구로 되어 있다. <흥비가>는 ≪시경≫의 노래체인 흥[興 : 먼저 다른 물건을 읊어서 그 목적한 것을 끄집어 일으키는 것]과 비[比 : 어떤 사물을 끌어대어 그와 비슷한 다른 사물을 가리켜 하는 말]를 사용하여 도를 닦는 법을 가르친 노래이다. 도를 닦는 일은 결코 어렵고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일상적인 일부터 요령 있게 행하는 데에서 깨달을 수 있다고 하였다. 이렇게 보면 <흥비가>는 천도 파악의 인식론적 과정을 비유적으로 노래한 가사라고 할 수 있다.


(9) 검결 : 1861년에 지은 가사로, 2음보 1구로 총 24구의 짧은 노래이다. ‘칼노래’라는 뜻의 이 노래는 최제우가 정치적 변혁을 꾀하였음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최제우는 전라북도 남원의 은적암에서 수도를 하면서 득도의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이 <검결>을 짓고 목검[木劍]으로 춤을 추었다고 한다. “용천검 드는 칼을 아니 쓰고 무엇하리, 무수장삼 떨쳐 입고 이칼 저칼 넌즛 들어 호호망망 넓은 천지 일신으로 비켜서서 칼노래 한 곡조를 시호시호 불러내니.”에서 보듯이, 최제우는 수도에만 그치치 않고 상원갑 세계를 위한 변혁을 꾀하였던 것이다. 이 때문에 최제우는 처형당하였고, <검결>도 ≪용담유사≫의 다른 작품들과 함께 전해지지 못하였다. 갑오동학농민전쟁 때는 동학군의 군가로 애창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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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동학가사(東學歌辭)』 Ⅰ(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79)
  • 『한국가사문학론』(정재호, 집문당, 1982)
  • 「용담유사의 내용분석」(김인환, 『문학과 문학사상』, 열화당, 1978)
  • 『한국문학통사』 4(조동일, 지식산업사, 1986)
  • 「용담유사의 근대적 성격」(정재호, 『근대문학의 형성과정』, 문학과 지성사, 1983)



2018년 05월 17일


충북 단양의 투구봉 주유소에서

단양의 화통 / 6K2FYL. 신영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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