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통의 이야기

도포서원의 흔적을 찾아서.

단양의 화통 2018. 3. 4. 16:34



             도포서원의 흔적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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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포서원(道浦書院)의 역사.

 

    춘천지역의 학문을 이끌어 온 대표적인 서원 중 하나가 도포서원(道浦書院)이다. 관심을 가지고 이리저리 자료를 조사하고 현장을 답사한지 오래 되었다. 그러나 막상 도포서원에 대한 글을 쓸 엄두가 나지 않았다. 확실한 서원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자료가 생각보다 많지 않아서이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다. 

    최근에 다시 한 번 도포서원터를 갔다 오면서 더 이상 미룰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글을 쓰고, 이후에 자료가 더 나타나면 부족한 점을 보충하자고 책임을 회피할 구실을 찾았다.

    도포서원을 설명하는 대부분의 자료들은 ‘1650년에 박장원(朴長遠:1612~1671)이 비방동(悲芳洞)에 사우(祠宇)를 건립했다’는 말로 시작한다. 물론 일리가 있다. 그때부터 서원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것으로 보는 것은 타당하다. 그러면 장절공(壯節公) 신숭겸(申崇謙)의 묘역이 춘천 서면에 자리 잡은 후부터 1650년 사이의 긴 시간은 공백상태란 말인가? 
 

    도포서원의 역사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해보는 것이 우선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고  『도포서원학술조사보고서』와 여러 자료들을 토대로 정리해본다.  
 
■ 927년, 묘소 옆에 원당(願堂)을 설치하다. 


    927년 9월 경상도 공산에서 후백제와 전투가 벌어진다. 초반에 고려군이 승리하는 것 같았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왕건은 견훤이 이끄는 후백제군에게 포위되어 위험하게 된다. 이때 신숭겸이 “제가 대왕과 외모가 비슷하니 제가 대왕으로 변장하면 대왕께서는 무사히 탈출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왕건의 옷을 빼앗아 입는다. 왕건은 일반 군졸로 변장하여 포위를 뚫고 탈출한다. 왕건이 포위망을 빠져나가는 동안 신숭겸은 왕건의 행세를 하며 왕건의 백마를 타고 군대를 통솔하다가 왕건이 무사히 빠져나간 이후 견훤의 군대가 쏜 화살에 맞고 전사한다. 후백제군은 그의 시신에서 머리를 베어간다. 이후 신숭겸의 시체를 발견한 왕건은 크게 슬퍼하여 송악으로 철수할 때 참수되어 머리가 없던 신숭겸의 시신에 금으로 만든 머리 모형을 끼워 넣어 장사지내고 장절(壯節)이라는 시호를 내린다.


   역사에 대해 문외한이라고 하더라도 이 대목을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 다음의 일을 1565년에 좌의정 심통원(沈通源)은 「장절공 신숭겸 행장」에서 이렇게 기록한다. 

 

(태조가) 유사에게 명하여 장지를 광해주(光海州) 소양강(昭陽江) 비방동(悲方洞)으로 옮기게 하고 예로써 장사를 지냈다. (중략) 묘소 곁에 원당(願堂)을 두어 명복을 빌게 했다.

 

     광해주(光海州)는 춘천을 말하고, 비방동(悲方洞)은 춘천시 서면 ‘방동리’를 가리킨다. 위 글에서 ‘묘소 곁에 원당(願堂)을 두어 명복을 빌게 했다’는 구절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원당(願堂)’을 ‘한국고전용어사전’에서 찾아봤다. “죽은 사람의 진영(眞影)과 위패(位牌)를 모시고 원주(願主)의 명복을 기원하던 법당(法堂). 신라 중대 왕실의 조상숭배 시설로 중시되었으며, 점차 귀족층에도 확산되어 이후에 신라 멸망의 원인으로 작용. 고려에서는 원칙적으로 왕실 외에 관인의 원당 건립은 제도적으로 보장되지 않았고, 다만 특정 공신을 위해 일부 사원에 제사를 지내기 위한 재단을 설치하거나, 금품을 바쳐 원당으로 삼게 하였음. 따라서 고려 초의 원당은 개경과 근기 지방(近畿 地方)에 집중되었음”이라고 설명한다.


     사전에서 설명하는 원당의 개념과, 실제로 장절공 묘역 옆에 세워진 원당의 동이점도 중요하겠다. 그러나 묘소 옆에 건물이 세워졌다는 것은, 이것이 후대에 세워진 서원의 전신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사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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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절공 묘역


■ 994년, 태조묘(太朝廟)에 배향하다.


  『고려사』 를 보면 성종 13년(994년)에 본격적인 묘정 신설에 나서 태조묘(太朝廟)에 신숭겸을 배향한다.
 
    여름 4월 갑진일에 대묘(大廟)에 제향을 치른 다음 대종(戴宗)을 오실(五室)에 모시고 공신 배현경(裴玄慶), 홍유(洪儒), 복지겸(卜智謙), 유금필(庾黔弼), 신숭겸(申崇謙)을 태조묘에 배향했다. (『고려사』)

 

      대종(戴宗:?~969)은 태조 왕건(王建)의 7번째 아들이며, 성종의 아버지이다. 훗날 아들인 성종이 왕위에 올라 왕으로 추존되어 대종(戴宗)이라는 묘호를 받고, 선경대왕(宣慶大王)의 시호를 받아 태묘에 합사되었다.

 

     왕조국가에서 왕조 건국에 대한 공로나 군주를 위한 충성은 무엇보다 중요한 사회의 질서유지를 위한 가치였다. 고려 역시 국가체제가 어느 정도 정비된 이후에 국왕이 백성들에게 바라는 인물상을 제시할 필요가 있었는데, 국왕별로 묘정(廟廷)에 공신을 배향하는 관습이 생긴 것은 그런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포서원학술조사보고서』, 75면) 이후 고려시대 전 시기 동안 신숭겸은 태조묘(太朝廟)에 배향된다. 이것은 묘소 곁에 원당(願堂)이 있었지만, 나라에서 공식적으로 국왕이 제사를 거행한다는 의미이다. 때문에 신숭겸 묘소 옆의 원당은 제사 여부와 상관없이 비중에 낮았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 조선, 숭의전(崇義殿)에 배향하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된 후, 태조 이성계는 왕씨의 제사가 없어질 것을 염려하여 마전군(麻田郡)에 태조묘를 짓고 모시다가, 문종 때 와서 사당 이름을 숭의전(崇義殿)이라 하고 신숭겸 등을 배향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숭의전(崇義殿)에 대한 정보가 자세하다.

 

    군 서쪽 5리에 있는데, 본조 태조 원년(1392)에 예조에 명하여 마전현에 사당을 짓고, 고려 태조(太祖)ㆍ혜종(惠宗)ㆍ성종(成宗)ㆍ현종(顯宗)ㆍ문종(文宗)ㆍ원종(元宗)ㆍ충렬왕(忠烈王)ㆍ공민왕(恭愍王)을 제사하게 하고 제전(祭田)을 주었다. 세종(世宗) 7년(1425)에 유사(有司)들이 말하기를, “나라의 종묘(宗廟)에도 다만 오실(五室)을 제사하는데, 전조(前朝)의 사당은 팔위(八位)를 제사하니, 예에 맞지 않는다.” 하였다. 이에 태조ㆍ현종ㆍ문종ㆍ원종만 남겨놓고, 봄ㆍ가을 이중삭(二仲朔)에 향과 축문을 보내 제사했다. 문종(文宗) 2년(1452)에 고려의 후손 왕순례(王循禮)를 찾아서 그 제사를 맡아 지내게 하고, 그 사당 이름을 숭의전이라 하여 왕순례를 부사(副使)로 삼았다. 복지겸(卜智謙)ㆍ홍유(洪儒)ㆍ신숭겸(申崇謙)ㆍ유금필(庾黔弼)ㆍ배현경(裵玄慶)ㆍ서희(徐熙)ㆍ강감찬(姜邯贊)ㆍ윤관(尹瓘)ㆍ김부식(金富軾)ㆍ김취려(金就礪)ㆍ조충(趙冲)ㆍ김방경(金方慶)ㆍ안우(安祐)ㆍ이방실(李芳實)ㆍ김득배(金得培)ㆍ정몽주(鄭夢周) 등을 배향했다.(『신증동국여지승람』)

 

     브리태니커에 숭의전(崇義殿)에 대한 해설이 자세하다.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에 있는데, 이것은 새 왕조를 연 다음 전 왕조 왕의 위패와 왕릉을 보존하는 것이 전통적인 예의였기 때문에 세워진 것이다. 1397년(태조 6) 귀의군(歸義君) 왕우(王瑀)에게 이 지역의 봉토를 주고 머물면서 고려 태조의 묘를 세우도록 했다. 1399년(정종 1) 숭의전 건물을 짓고 고려 태조와 8왕(혜종·현종·원종·충렬왕·성종·경종·문종·공민왕)의 제사를 봄·가을로 2번 받들도록 했다. 그러나 1425년(세종 7) 예법에 제후는 5묘를 세워야 하는데 고려의 8위는 부당하다 하여 태조·현종·문종·원종 4위만을 받들도록 했다. 1445년에는 관리비용으로 묘지기에게 삼국시조위전(位田)의 예를 따라 각자수세지인 숭의전전(崇義殿田)을 1위에 3결씩 12결을 지급했다. 1451년(문종 1) 문종은 고려 현종의 후손이 이름을 바꾸어 공주에 사는 것을 찾아내 그에게 순례(循禮)란 이름을 지어주고 3품관직과 토지·노비를 지급하여 숭의전에서 대대로 제사를 받들도록 했다. 이때 숭의전이라 이름 했으며 배향공신도 선정하여 함께 받들도록 했다. 


     위의 자료들은 비록 왕조가 달라졌지만 장절공이 계속 태조 왕건과 함께 배향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숭의전(崇義殿)에 배향되었다는 것은, 묘소 옆에 위치한 원당(願堂)의 역할과 중요도도 변함이 없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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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숭의전과 장절공 신숭겸 위패, 출처: cafe.daum.net/callipia> 


■ 1650년. 박장원, 비방동(悲芳洞)에 사우(祠宇)를 건립하다.

 

    임진왜란(1592~1598)과 병자호란(1636~1637) 이후 국가체제가 흔들리고 있던 조선왕조는 지역별로 왕조 유지에 필요한 충절의 인물들을 내세워 사원이라는 국가 공교육 체제 내에서 왕조에 충성하는 인물들을 양성하고자 했다. 신숭겸과 관련된 사원 역시 그러한 기능을 원했던 조선국가의 교육 목표에 따라 만들어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신한장(申漢章)의 기문(記文)은 도포서원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자료다. 그의 글을 따라 도포서원이 변화해온 여정을 따라간다.

 

    경인년(庚寅年;1650)에 구당(久堂) 박공(朴公) 장원(長遠)이 춘천에 수령으로 와서 많은 선비들의 바람으로 인하여 비방동(悲芳洞)의 묘 아래에다 사우(祠宇)를 세워 향사처로 삼았다. 구당(久堂)은 장절공의 외손이다.

 

     박장원(朴長遠, 1612~1671)의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자는 중구(仲久), 호는 구당(久堂)이다. 1627년(인조 5) 생원이 되고 1636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649년 외직을 구해 춘천으로 오게 된다. 그의 재직 기간은 1649년 12월부터 1652년 4월까지이다. 바로 춘천부사로 있던 이 시기에 비방동(悲芳洞)의 묘 아래에다 사우(祠宇)를 세웠다. 비방동(悲芳洞)은 지금의 춘천 서면 ‘방동리’를 말한다. 사우(祠宇)는 사당을 말하는데, 기존의 원당터에 건물을 지었는지 확실치 않다. 여하튼 도포서원의 최초 형태는 제사를 지내는 역할이 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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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절공묘역 입구

박장원 송덕비, 춘천 소양로에 있다



■ 1694년, 신양(申懹), 사우(祠宇)를 도장포(道藏浦)로 이전하다.



신한장(申漢章)의 기문(記文)은 계속 이어진다.

 

    갑술년(甲戌年:1694)에 후손인 참판(參判) 신양(申懹)이 강원도 절도사로 순찰하다가 이 사우(祠宇)가 해마다 퇴락한 것을 안타깝게 여겨 유생들과 더불어 도장포(道藏浦)의 고산(孤山)에다 옮겨 건립할 것을 논의하였다. 물자의 대부분은 감영 예산과 내외 자손으로부터 나왔다. 당시는 새로이 조정에서 금지하는 명령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서 도움을 요청할 수 없었다. 이에 일을 크게 벌일 수 없어서 체단(體段;조직과 구성)도 전혀 구비되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유생들이 유식(遊息;심신을 풀고 쉼)하는 장소 따위는 실마리도 얻지 못하여 사림들이 병통으로 여긴지 오래되었다.

 

     신양(申懹:1630~1706)에 대한 정보는 많지 않다. 1657년 사마시에, 1678년 증광시(增廣試)에 합격한 것으로 나타난다. 파견기록은 없으나 53세 때인 1683년에 암행어사 신양(申懹)의 장계에 따라 포상을 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관동지』에 의하면 1694년 6월에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같은 해 12월에 대사간으로 옮겼다. 이 기간에 춘천시 서면 방동리에 있던 사우(祠宇)를 옮긴 것으로 보인다. 


     ‘도장포(道藏浦)고산(孤山)’ 으로 옮겼다는 대목은 중요하다. 도장포(道藏浦)에서 ‘도포(道浦)’란 명칭이 나왔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춘천읍지』는 ‘도포서원’ 에 대해 ‘부의 서쪽 20리 오매리(梧梅里)에 있다’고 기록한다.  『강원도지』는 ‘신매리’에 있다고 적는다.  『도포서원학술조사보고서』에 의하면 서원터를 ‘서면 신매리 100-1, 101번지’ 일대로 추정한다. 그렇다고 한다면 도장포는 신매리에 속한 어느 지역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고산(孤山)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고산(孤山)은 고산대(孤山臺)로도 부르며, 춘천 상중도(上中島) 북쪽 끝에 있는 곳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고산은 돌로 이루어진 돌출 봉우리로 그 위에 십여 명이 앉을 수 있고, 이곳에 앉으면 사방 30리는 족히 볼 수 있다고 한다. 신매리 바로 앞에 자리 잡고 있다. 간혹 ‘고산(孤山)’을 ‘오산(熬山)’으로 표기하는 자료도 있는데, 이것은 잘못 기록한 것 같다.  
 

   숙종(肅宗) 재위 당시 서원은 건립과 유지에 필요한 비용을 지방관에게서 각출하는 폐단을 초래하는 등 여러 면에서 사회적 폐단을 일으킨다. 그러자 숙종 2년(1676)에는 서원의 기부금품 모집을 금지시키고, 숙종 36년(1697)에는 서원의 정원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한 유현(儒賢)의 서원은 30명, 사액서원은 20명, 사액을 받지 못한 서원은 15명으로 한정하였다. 그리고 다음해(1698)에 서원의 첩설(疊設)을 엄중히 금지하게 된다. 조정에서 금지하는 명령이 있었다는 말은 이러한 상황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여하튼 도포서원은 방동리 시대에서 신매리 시대를 맞게 되었고, 그 중심에는 신양(申懹)이 있었다. 그러나 서원의 체제를 갖추지 못한 사우(祠宇)의 형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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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매리 야산에서 바라본 고산과 봉의산



■ 1708년, 신한장(申漢章), 서원으로 리모델링하다.



신한장(申漢章)의 기문(記文)은 자신이 한 일에 대해 간략하게 기술한다.

 

    못난 후손인 내가 부임한 뒤 봉급을 기부하여 날마다 문(門)과 담장, 외숙(外熟)을 계획하고 처리하여 형태를 만들었으니, 지난 시기에 겨를이 없던 일을 지금 수선하여 공사를 한 것이다. 이미 새로 지었으나 장차 그만두려하다가, 또 수리하였으나 갖추질 못하였다가, 오늘에 이르러서야 원(院)의 모양이 대강 이루어졌다. 어찌 사문(斯文)의 다행과 불행의 운수가 그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묘소 앞 뜰에 대석(坮石: 받침돌)이 없었으나 새로 만들어서 설치하였다. 조그맣게 선조를 향한 것이 진실로 마쳐졌으며, 조금도 저버리지 않은 것은 모두 성스런 임금의 은택이다. 고을 사람 황관(黃琯) 역시 공의 외가 자손으로 시종일관 한마음으로 역사를 도왔다. 아! 상사(上舍) 황위양(黃渭陽)의 생각 또한 드높일 만하다.

 

    신한장(申漢章)은 『춘천읍지』에 신장한(申章漢)으로 되어 있어서 혼동이 된다. 그러나  『강원도지』나 당시 사료들을 보면 신한장(申漢章)이 맞다. 그의 재직 기간은 1708년 4월부터 1709년 6월까지이다. 김유(金楺, 1653∼1719)의 「유풍악기(游楓嶽記)」를 보면, 그는 1709년 춘천을 지나가면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긴다. “춘천부(春川府)에서 점심을 먹었다. 안보(安保)부터 여기까지 40리이다. 수령 신한장((申漢章)이 나와서 알현하고 음식을 차려주고 여행 경비를 보태주었다.” 이러한 자료들은 당시 춘천부사가 신한장(申漢章)이었음을 뒷받침해준다.


   서원의 규모를 알려주는 단서는 ‘문(門)과 담장, 외숙(外熟)’을 지었다는 구절뿐이다. 그런데 문(門)과 담장은 이해가 가지만 ‘외숙(外熟)’의 정체가 궁금하다. 아무리 찾아봐도 알 수 없다.  ‘외숙(外熟)’을 ‘외숙(外塾)’으로 해석하는 자료도 있다. 이 경우 학생들이 묵는 동서재(東西齋)로 이해한 것인데, 당시 통용되는 동서재(東西齋)를 사용하지 않은 이유와, 숙(熟)을 쓴 이유에 대한 명료한 답변이 필요하다. 혹시 음식을 만드는 곳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묘소 앞 뜰에 대석(坮石: 받침돌)을 새로 설치했다’는 것은, 장절공 묘역에 시설물을 설치했다는 것으로 서원의 건물 구성과는 별도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여기서 도포서원의 성격에 대해 검토할 필요가 있다. 신경(申暻, 1696∼?)의 『직암집(直菴集)』에 「춘천 도포원(道浦院)의 유생에게 답하다[答春川道浦院儒]」란 글이 있다. 신경(申暻)의 나이를 염두에 두면 1700년대 중후반에 쓴 편지일 것이다.

 

    귀(貴) 서원은 장절공(壯節公)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인데, 공의 묘역은 경내(境內)에 있으니 일의 상태와 인정과 도리는 다른 곳의 사우(祠宇)와 마땅히 다릅니다. 수호(守護)의 도리에 대해서는 이것과 저것으로 다르게 볼 수 없습니다. 묘소의 제사는 참으로 중요하고 서원(書院)에서 나라의 의식으로 제사를 지내는 것도 또한 큰일입니다. 어찌 하나를 들어서 하나를 폐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편지를 보면 재력(財力)이 미치지 못하여 제사 때 쓰는 물건을 그만 두려고 하니 이것은 참으로 마음을 놀라게 하여 몹시 놀래어 듣는 것이니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게 해야 합니다. (생략)

 

     서원은 조선 중기 이후 학문연구와 선현제향(先賢祭享)을 위하여 사림에 의해 설립된 사설 교육기관인 동시에 향촌 자치운영기구이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서원은 단순한 사림의 교학기구에만 그치지 않고 강학활동을 매개로 하여 향촌사림 사이의 지면을 익히고 교제를 넓히는 곳으로서의 구실과, 특히 향촌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문제에 관한 의견교환이나 해결책을 논의하는 향촌운영기구로서의 기능을 더하였다. 
 

    그런데 위 편지를 보면 도포서원을 ‘제사지내는 곳’으로 규정하고 있다. 두 기능 중에서 선현제향(先賢祭享)에 관련된 일을 강조한 것이다. 물론 이것은 제사를 제대로 지내지 않으려는 것에 대한 염려 때문에, 한 부분만 강조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도포서원에서 장절공의 제사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상당하다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참고로 조선 후기에 서원이 증설되는데, 가문의식이 강화되어 후손에 의한 조상 제향처를 중심으로 서원이 건립된 것도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었음을 참고할 만하다. 

 

■ 1786년, 김락수(金樂洙), 도포서원 「중수병기(重修幷記)」를 짓고, 김의협(金義協)은 편액을 쓰다.


     『수춘지』에 의하면 “영조(英祖) 병오년(丙午年,1786년)에 부사 김락수(金樂洙)가 「중수병기(重修幷記)」를 쓰고 진사 김의협(金義協)이 편액을 썼는데 아직도 방동 묘비각에 있다.”는 대목이 있다. 김락수의 재위 기간은 1784년부터 1786년 12월이다. 이 시기는 정조 임금 때이니, 『수춘지』의 오기일 것이다. 그러나 임금 표기만 이상이 있을 뿐 시기에 문제는 없는 것 같다. 기사만 있고 내용은 전하질 않지만, 이 문장을 통해 몇 가지를 추정할 수 있다. 「중수기(重修記)」는 건물을 리모델링하고, 그 과정을 기록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삼는다. 따라서 김락수(金樂洙)의  「중수병기(重修幷記)」도 이러한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 시기에 건물을 리모델링했음을 알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진사 김의협(金義協)이 편액을 썼다’는 것이다. 지금도 전해지는 ‘도포서원’이란 편액은 무엇을 알려주는가. 그 이전에는 ‘도포서원’이 아니라 사우(祠宇)의 성격이 짙은 ‘도포원(道浦院)’이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신경(申暻, 1696∼?)의 편지 제목은  「춘천 도포원(道浦院)의 유생에게 답하다[答春川道浦院儒]」였는데, 바로 여기서 ‘도포원(道浦院)’이라고 쓰고 있다. 편액이 불타거나 파손되지 않았다면 새삼스럽게 ‘도포서원’이라 편액을 쓸 이유가 없을 것 같은데, 모를 일이다. 여하튼 다시 증개축하여 서원은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출발하게 된다.

 

■ 1809년, 김의협, 「도포원록(道浦院錄)」을 만들다.

 

       김의협(金義恊)은 우정(憂亭) 김경직(金敬直, 1569-1634)의 6세손이다. 1786년에 도포서원의 편액을 쓴 그는 1809년에 「도포원록(道浦院錄)」을 작성한다. 그는 원록(院錄)을 짓게 된 이유를 밝히면서 장절공과 상촌 신흠, 그리고 우정 김경직의 사실을 기록하여 책을 만들고 ‘원록(院錄)’이라 이름 붙인다고 적고 있다. 
 

    위에서 ‘서원’과 ‘원’을 구별하고자 시도했는데, ‘도포서원’이라 편액을 쓴 김의협이 「도포원록(道浦院錄)」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도포서원’이란 명칭과 ‘도포원’이란 이름이 혼용되어 쓰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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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포서원 터





■ 1871년, 서원철폐령에 따라 철폐하다.

 

     대원군이 섭정하자 고종(高宗) 8년(1871)에 서원철폐령을 반포하여 전국에 사액서원 47개소만 남기고 600여소의 사원을 헐어 부순다. 도포서원도 이 시기에 철폐된 것으로 보인다. 『춘천의 역사와 문화유적』과 『도포서원학술조사보고서』에 의하면, 서원철폐령이 내려졌을 대 신달수씨의 증조인 진사 신건조(申建朝)가 건물을 허물고 위패를 강당이 있었던 근처의 강당봉(講堂峰)에 묻었다는 말을 조부인 신효선(申孝善)에게서 들었다고 한다. 신달수씨가 살았던 건물은 서원에서 행사(行祀)를 할 때 음식을 만들던 행랑채였다고도 하며, 혹은 서원의 건물을 헐어서 지은 것이라고도 한다. 위패를 묻은 강당봉 봉우리에 신효선이 담을 쳐서 기와를 얹었다고 하는데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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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패를 묻은 강당봉과 와편


2. 배향 인물.


 

      박장원(朴長遠, 1612~1671)이 춘천부사로 있던 1650년에 비방동(悲芳洞)의 묘 아래에다 사우(祠宇)를 세우고 장절공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향하였다. 이후 1694년에 신양(申懹)이 사우(祠宇)를 도장포(道藏浦)로 이전하면서 신매리 시대가 열린다. 이 때 신흠(申欽)과 김경직(金敬直)을 배향하기 시작한다.


    신숭겸(申崇謙, ?~ 927)의 본관은 평산(平山). 초명은 능산(能山)이다. 태봉 말기에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복지겸(卜智謙) 등과 함께 기병대장으로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추대하여 918년에 고려를 개국하는 데 공을 세웠다. 927년 견훤이 이끄는 후백제군과 공산(公山:지금의 경북 달성군 팔공산)에서 전투가 벌어졌을 때 대장군으로 군사를 이끌고 참여했다. 견훤의 군대가 태조를 포위하여 형세가 매우 위급해지자, 김락(金樂)과 더불어 싸우다가 전사했으며 그 덕분에 태조는 간신히 피신했다. 994년(성종 13) 태사(太師)로 추증되어 개국장절공(開國壯節公)으로 태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신흠(申欽, 1566~1628)의 자(字)는 경숙(敬叔), 호는 현헌(玄軒)·상촌(象村)·현옹(玄翁)·방옹(放翁)이다. 평탄한 벼슬생활을 하다가 계축옥사(癸丑獄事)를 만나게 되어 벼슬에서 물러난다. 1616년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비 및 이와 관련된 김제남(金悌男)에게 죄를 더하는 것에 대해 논의가 있을 때, 한응인(韓應寅), 박동량(朴東亮), 서생(徐渻) 등과 함께 사흉(四凶)으로 지목되어, 이듬해 1월에 춘천으로 오게 되었다. 그는 춘천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1621에 풀려난다. 
 

    우정(憂亭) 김경직(金敬直, 1569-1634)이 춘천으로 온 시기는 1615년이나 1616년으로 추정되며, 1623년까지 있었다. 춘천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신흠(申欽)과 우두정(牛頭亭)에서 도의(道義)를 나눈 것으로 유명하다. 묘갈명에 의하면 신흠이 김경직의 학식과 지조를 알고 있어서 매우 중시했다고 적고 있다. 김경직은 1634년(인조12) 12월 1일 66세로 졸하였고 70여년 후, 우두정에서 함께 도의를 논하며 시를 지었던 신흠과 춘천의 도포서원에 배향되었다.

 

     도포서원과 관련된 자료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아직 발견하지 못한 자료가 많을 것이다. 자료를 발굴하여 보완할 과제가 남아 있기 때문에 이 글은 아직 미완이다. 글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도포서원에 대한 발굴과 조사가 1차적으로 이루어졌지만, 후속 조치가 필요하다. 최소한 서원터를 알려주는 안내판 하나 설치하지 못한 것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의 책임이다. 춘천지역의 문화공간으로 역할을 담당해왔던 도포서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필요한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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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구요람 중 춘천 일대. 1834년에 김정호(金正浩)가 작성한 ≪청구도 靑邱圖≫의 이본(異本). 도포서원이 ‘서원’으로 표시되어 있다.


 


《참고문헌》

『강원도지』,『검재집(儉齋集)』,『관동지』, 『수춘지』,『연려실기술』,『직암집(直菴集)』,
『춘천읍지』
『강원도향교서원사찰지』, 강원도, 1992.
『도포서원학술조사보고서』,  강원향토문화연구회, 2001. 
『춘천군의 문화와 역사유적』, 1994.
『춘천의 역사와 문화유적』, 1997.



권혁진 ; 강원한문고전연구소장. 고전을 바탕으로 강원도 지역을 답사하고 있다.



2018년 03월 04일


충북 단양의 투구봉 주유소에서

권혁진님[강원한문고전연구소장]의 도포서원의 흔적을 찾아가는 길

을 복사하여


단양의 화통 /6K2FYL. 신영섭 올림.







도포서원(道浦書院)


1650년(효종원년)

대한민국 강원도 춘천시 서면 신매리 802




연 혁


강원 춘천시 서면 신매리에 있었다.

도포서원은 강원도 춘천부 서쪽 15리쯤인 소양강 위 도장포(道藏浦)의 고산(孤山)에 있었다.

효종 원년(1650년)에 강원도 관찰사 박장원(朴長源)이 비방동(悲方洞) 장절공(壯節公) 묘소 아래에 창건하여 고려태사(高麗太師) 장절공(壯節公) 신숭겸(申崇謙)을 향사하였는데 숙종 20년(1694년) 갑술에 강원도 관찰사 후예손인 신양(申懷)이 이 곳으로 이건하면서 후손인 영의정 문정공 신흠(申欽)과 증도승지(贈都承旨) 김경직(金敬直)을 배향하였는데 고종 8년에 훼철되었다.

 

원우(院宇)의 편액은 방동 재실에 보존하였는데 1976년 6월에 장절공 묘소 및 신도비와 함께 강원도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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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향인물

 

1)신숭겸(申崇謙)


      ?~ 927(태조 10). 고려 초기의 무신.

     본관은 평산(平山). 초명은 능산(能山). 고려사에 의하면 광해주(光海州지금의 춘천출신이며체격이 장대하고 용맹이 있었다고 한다태봉 말기에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복지겸(卜智謙등과 함께 기병대장으로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추대하여 918년에 고려를 개국하는 데 공을 세웠다그 공으로 개국공신 1등에 봉해지고대장군이 되었다. 927(태조 10) 견훤이 이끄는 후백제군과 공산(公山지금의 경북 달성군 팔공산동수(桐藪)에서 전투가 벌어졌을 때 대장군으로 군사를 이끌고 참여했다

    견훤의 군대가 태조를 포위하여 형세가 매우 위급해지자원보(元甫김락(金樂)과 더불어 싸우다가 전사했으며 그 덕분에 태조는 간신히 피신했다태조는 그의 동생 능길(能吉), 아들 보()를 원윤(元尹)으로 등용하고 지묘사(智妙寺)를 창건하여 그의 명복을 빌게 했다. 994(성종 13) 태사(太師)로 추증되어 개국장절공(開國壯節公)으로 태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1120(예종 15) 그와 김락을 추도하여 예종이 도이장가 悼二將歌라는 향가를 지었다시호는 장절(壯節)이다.

2) 신흠(申欽)

    1566(명종 21)~ 1628(인조 6). 조선 중기의 문인·정치가.

    이정구(李廷龜)·장유(張維)·이식(李植)과 함께 '월상계택'(月象谿澤)이라 통칭되는 조선 중기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경숙(敬叔), 호는 상촌(象村)·현헌(玄軒)·방옹(放翁). 아버지는 개성도사 승서(承緖)이며, 어머니는 은진송씨로 좌참찬 인수(麟壽)의 딸이다.

     7세 때 부모를 잃고 장서가로 유명했던 외할아버지 밑에서 자라면서 경서와 제자백가를 두루 공부했으며 음양학·잡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개방적인 학문태도와 다원적 가치관을 지녀, 당시 지식인들이 주자학에 매달리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이단으로 공격받던 양명학의 실천적인 성격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문학론에서도 시(詩)는 '형이상자'(形而上者)이고 문(文)은 '형이하자'(形而下者)라고 하여 시와 문이 지닌 본질적 차이를 깨닫고 창작할 것을 주장했다. 특히 시에서는 객관 사물인 경(境)과 창작주체의 직관적 감성인 신(神)의 만남을 창작의 주요동인으로 강조했다. 

     시인의 영감, 상상력의 발현에 주목하는 이러한 시론은 당대 문학론이 대부분 내면적 교화론(敎化論)을 중시하던 것과는 구별된다. 1585년 진사시·생원시에 합격하고, 158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1589년 춘추관원에 뽑히면서 사헌부감찰·병조좌랑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에는 도체찰사(都體察使) 정철의 종사관으로 있었으며, 그 공로로 지평(持平)으로 승진했다. 이후 선조에게 뛰어난 문장력을 인정받아 대명(對明) 외교문서의 작성, 시문의 정리, 각종 의례문서의 제작에 참여했다. 1599년 큰아들 익성(翊聖)이 선조의 딸인 정숙옹주의 부마가 되었고, 1601년 〈춘추제씨전〉을 엮은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었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예조판서가 되었다. 47세 때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나 선조로부터 영창대군의 보필을 부탁받은 유교칠신(遺敎七臣)의 한 사람이라 하여 파직되었다. 이후 10여 년 동안 정치권 밖에서 생활했다.

     1616년 인목대비의 폐비사건으로 춘천에 유배되었다가 1621년 사면되었다. 이 시기에 문학을 비롯한 학문의 체계가 심화되어 〈청창연담 晴窓軟談〉·〈구정록 求正錄〉·〈야언 野言〉 등을 썼다. 1623년 인조반정과 함께 대제학·우의정에 중용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좌의정으로 세자를 수행하고 전주로 피난했으며, 같은 해 9월 영의정에 올랐다가 죽었다. 1651년 인조묘정에 배향되었고, 강원도 춘천의 도포서원(道浦書院)에 제향되었다. 63권 22책 분량의 방대한 〈상촌집〉을 남겼는데, 1981년 경문사에서 구두점을 찍어 영인본을 펴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3) 김경직(金敬直)

     1567(명종 22)∼1634(인조 1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선산. 자는 이정(而正), 호는 우정(憂亭). 아버지는 사직(司直) 광계(光啓)이다.

     1590년(선조 23)에 진사가 되고 1610년(광해군 2)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이 되었다.  그뒤 전적·은계찰방 등을 역임하였으나 광해군의 난정에 실망, 관직에서 물러나 춘천 우두촌(牛頭村)에 은거하며 계축옥사로 그곳에 유배중이던 신흠(申欽)과 교유, 학문을 토론하기도 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낭천현감에 기용되어 선정을 베풀었으며, 이어서 병조좌랑·사도시정 등을 역임하였다.
도승지에 추증되고 춘천의 도포서원(道浦書院)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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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3월 04일


[재] 한국의 서원 통합보전관리단의 서원위치도를


충북 단양의 투구봉 주유소에서

도포서원과 도포서원의 위치도를 복사하여


단양의 화통 /6K2FYL. 신영섭 올림.




도포 서원
 
      도포서원에 신숭겸, 김경직 등과 함께 배향된 신흠(1566∼1628)은 신숭겸의 19대 손으로  이조판서, 대제학,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김경직(1567∼1634)은 문행이 놓은 인물로 인목대비에 대한 페모사건 등의 난정(亂政)등을 한탄하며 벼슬을 버리고 춘천 우두(牛頭)로 내려와 은거하면서 신흠과 함께 우두정(牛頭亭)을
중심을 하는 춘천 지역의 자연을 벗삼아 도의를 강론하였다.

도포서원은 춘천시 서면 신매 3리에 있었던 서원이다.


    이 서원은 1650년(효종 원년) 신숭 겸의 외손인 춘천부사 구당(久堂) 박장원(朴長遠)이 춘천지방 유생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悲芳洞(현재의 서면 방동리) 장절공 묘역 밑에 건립한 것이다.

 

    고려 태조 왕건의 개국공신[충신]이었던 壯節公 申崇謙(?-927)을 배향하였다.


    1694년(숙종 20년) 후손인 참판 신회(申懷)가 강원도관찰 사로 나왔다가 서원이 퇴폐한 것을 보고 민망하게 여긴 나머지 현재의 위치인 도장포(道藏浦)의 오산(鰲山, 현재 신매 3리)으로 옮기면서 상촌(象村) 신흠(申欽, 1566-1628)우정(憂亭) 김경직(金敬直, 1569-1634)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처음 설립 당시의 명칭을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이건하면서 신흠과 김경직이 살았던 장소인 '도장포'라는 지명에서 서원명을 따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때에는 국가에서 모금을 금하였기 때문에 재정이 모자라서 규모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였다. 그 뒤 후손인 신한장(申漢章)이 춘천부사로 재직하는 동안 (1708-1709) 자금을 염출하여 서원의 규모를 갖추어 짓고 도포서원의 설립의 전말을 밝히는 「道浦書院重修記」를 지었다.

이 때에 춘천에 사는 신숭겸의 외손인 황관도 열심히 도왔다 고 한다.

 

    도포서원은 사액은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서원의 체제를 갖추지 못하고 제향만을 드리는 역할을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1871년(고종 8년)에 철폐되었다.

도포서원은 춘천군 내의 다른 서원 터에 비하여 상당한 물증을 확보하고 있다.

도포서원 터에는 2001년 작고하신 장절공의 후손 申達秀 씨가 거주하고 있었다.

한림대학교 박물관에 서 이곳을 조사하면서 기록해 놓은 자료에 의하면, 원래의 도포서원은 장절공 묘역 내에 있 었는데, 신흠과 김경직의 후손들이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1786년(정조 10년)에 김경직의 후손인 金義協이 현판을 썼다고 한다.

현판은 현장에 보관되었다가 30여년 전에 장절 공기념관으로 옮겨 현재까지 소장하고 있다.

또 신달수씨는 대원군이 서원 철폐령을 내렸을 때 자신의 증조부인 進士 申建朝가 건물을 허물고 위패를 강당 옆의 講堂峯에 묻었다는 말 을 조부인 申孝善에게서 들었다고 한다.


     위패를 묻은 강당봉 봉우리에 신효선이 담을 쳐서 기와를 얹었다고 하는데 지금도 그 흔적이 역력하다. 신달수씨가 살고 있는 현 건물이 서원 에서 행사를 할 때 음식을 장만하던 행랑처였다고 한다.  그는 현재 서원의 것으로 추정되는 주춧돌을 밭터에서 찾아 집 뒤에 보관하고 있다.

 

장절공 묘역, 신도비,


            

                 <춘천시 서면 신매 3리 101번지의 도포서원지 전경>                  



 <도포서원의 초석으로 쓰였던 돌들이 민가의 장독대로 이용되고 있다>    

 



<도포서원이 훼철되고 난후 서원의 목재를 이용하여 지어졌다는 집이 서원지 바로 앞에 있으며,  사진은 그 일부의 모습이다.>


 

                 


2019년 03월 23일


오후 14시경에서 15시경까지

함박눈이 억수로 퍼 부었고

지금은  아주 날씨 좋은 날!


춘천박씨 선기공 종친회의 도포서원 자료를 Copy하여


충북 단양의 장촌말 집에서

단양의 화통 / 6K2FYL. 신영섭 옮겨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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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浦서원[도포서원]



     서면 신매리에 건립된 서원으로 1650(효종 1)에 춘천부사 박장원(朴長遠)이 춘천지역 유생들의 건의로 신숭겸 묘역 아래에 신숭겸을 배향하기 위하여 건립했던 것을 1694(숙종 20)에 강원도 관찰사 신회(申懷)가 현재의 위치로 옮기고 상촌(象村) 신흠(申欽)과 우정(憂亭) 김경직(金敬直)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이후 춘천부사 신한장(申漢章)이 서원의 격식을 갖추게 증축하였다. 도포서원은 사액을 받지 못했으며 흥선대원군이 서원 훼철령을 내렸을 때 철거되었다. 도포서원의 이름은 이 지역이 도장포(道藏浦)였는데 이 지명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10)도포서원의 터에는 신달수씨가 생전에 살던 민가가 있고 이 집의 기둥 등이 서원이 철거되고 집을 지을 때 사용되었다는 말이 전해져 온다.


       또한 주변의 밭을 갈 때 큰 돌들이 흙속에 묻혀 있다는 말도 전해 온다. 민가를 철거할 경우 사용된 목재에 대한 조사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11)


      도포서원에 관련된 문헌자료로는 신한장의 도포서원중수기(道浦書院重修記), 김의협의 도포원록서(道浦院錄序), 김진규의 고장절공신선생문(告壯節公申先生文)·고상촌신선생문(告象村申先生文)·고우정김선생문(告憂亭金先生文)등이 전한다.



배향위차(配享位次)

고려태사장절공신선생 주향(高麗太師壯節公申先生 主享)

영의정문정공상촌신선생 동종향(領議政文貞公象村申先生 東從享)

정랑증도승지우정김선생 서종향(正郎贈都承旨憂亭金先生 西從享)

 


현판 : 도포서원/상지십년병오삼월상순일 우정김선생육세손의협근서

(道浦書院/上之十年丙午三月上旬日 憂亭金先生六世孫義協謹書


10)오춘택·오영섭, 춘천의 유교유적, 『춘천의 역사와 문화유적』, 한림대학교 박물관, 1997, 286~289.

11)​강원향토문화연구회, 『도포서원 학술조사보고서』,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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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포서원(현판, 1786(정조 10) 제작. 189×39. 두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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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매리 도포서원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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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포서원 터(밭이 서원터 :  남→북)                         도포서원 터(밭이 서원터: 북→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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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포서원 터의 민가                                                                                           도포서원 터의 민가




2019년 04월03일


교육시설 ; 춘천 지역의 유교에서

도포서원 자료를 Copy하여


충북 단양의 장촌말 집에서

平山 申家

36대손인 신성부원군파

申英燮 / 6K2FYL. 단양의 화통 올림.






○ 신매리 도포서원 터


      도포서원은 현재 가장 자료가 많이 남아 있는 서원이다. <춘천의 역사와 문화유적>에도 비교적 상세한 설명과 관련 기록들 원문이 실려 있다. 또한 지난 해의 답사에서 보았듯 1786년의 현판(김의협)도 장절공 기념관에 전해온다.


     이번 답사에 참가한 신대수 님은 현재 서원터에 남아 있는 건물은 서원철폐령 뒤 그 부재로 옮겨 지은 것으로 자신의 형님댁이라고 하였다. 어려서 와서 제사도 지내고 인근에서 놀던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정확한 위치는 집뒤의 밭이다. 주춧돌이나 서까래 등의 한옥 부재들이 일반 가옥과는 다른 치목 상태임을 지난 해에도 확인하였으나, 집 옆의 산봉우리 위에 봉분이 있고 와편 조각을 주워 놀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왜 아직 그곳을 발굴하여 보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춘천...문화유적>에는 '강당봉'이라고 되어 있고 신달수의 조부인 신효선이 봉분에 담을 치고 기와를 얹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18세기 초 춘천부사를 지낸 신한장의 <도포서원중수기>에는 "장포의 고산에 옮겨 지었다[移設於道藏浦之孤山]"이라고 되어 있다(준비 안내물의 '오산'은 오식임!). 아울러 1809년의 <도포서원록서>(김의협)에서 정조로부터 사액을 받지 못한 연유를 설명한 것은 작년 답사기에 말한 그대로다.








서원철폐령 때 일부 유물을 향교로 옮겼다고 하였으나 이처럼 진짜 귀한 자료는 매설해 놓고 때를 기다렸음을 증언하는 자료가 확실한 것이다. 우리 지역의 문화유산으로서 복원의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는 서원이라는 의견들이 많았다.



2019년 04월03일


[사]춘천역사문화연구회[cafe. daum. net/history.cc]에서

춘천역사문화연구회 2012년 제3차답사에서

도포서원 자료를 Copy하여


충북 단양의 장촌말 집에서


平山 申家

36대손인 신성부원군파

申英燮 / 6K2FYL. 단양의 화통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