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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恩鋪路[당은포로] 답사기[2]

단양의 화통 2013. 6. 16. 17:57

 

唐恩鋪路[당은포로]답사기

화성사 문화관광해설사 ; 이길원씨 기고문

 

 

진천의 김유신 생가와 삼남대로

 

      가야의 왕족이었던 김유신 생가가 진천이었다면 이상할 수도 있겠으나 김유신의 아버지가 신라 장수로서  당시 최전방이었던 진천의 장수였으며 그래서 김유신이 진천에서 태어났다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김유신 생가에서 서쪽으로 보이는 산악 능선 넘어가 바로 천안이었다.  또 천안과 진천사이에 유서깊은 고갯길이 있었다.

 

      진흥왕 이후 신라는 진천에 주둔하고 산 넘어 천안의 백제군대와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김유신 생가 터는 그런대로 조성이 잘 되었고 관광객도 드물지 않다.

      삼국 시대가 끝나고 통일 신라시대가 도래하면서 호남, 충남의 백성들이 천안까지 와서 고개를 넘어 진천으로 오고 신라 사람들도 진천으로 오면서 경기도로 넘어오는 삼남대로가 열리게 되었다.

 

칠장사의 비밀과 일곱도적 이야기

 

       김유신 생가터에서 진천방향으로 2km쯤 후진하니까 안성으로 넘어가는 삼남대로가 나타났다.   삼남대로를 달리면서 안성과 진천의 경계를 넘어 안성지단에 들어서니 칠장사 입구가 나타났다.    나는 칠장사를 다섯번은 갔지만 칠장사에서 윤민용 선배가 해설을 하시는 곳이고 죽주산성까지 삼남대로를 안내 해주기로 하셔서 간 것이다.

 

       칠장사는 통일신라 직전의 선덕여왕 시절에  지은 절로서 그 골짜기에 숨어살던 일곱 도둑이 재산을 시주해서 지은 절이란다.   조선중엽에 어사 박문수가 과거를 보러 갈때 칠장사에서 자고 삼남대로를 따라 서울로 갔는데 꿈에 도인이 나타나서 칠언절구의 시를 읊어 주었는데 생생히 기억하고 과거장에 가니 바로 꿈의 그 시가 과제로 출제되어서 장원급제를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지금도 중,고생 어머님들이  칠장사에 와서 불공을 드리고 몽중시를 얻어가면 합격하였다는 속설이 퍼져서 입시철엔 어머님들이 문전성시를 이룬다고 하며 나도 아들, 딸에게 어사 박문수의 몽중시를 얻어다가 준바 있다.

 

     여기서 중요한 대목은 일곱 도둑이 도적질 할 때 어디를 털었는 가이다. 

     한국 제일의 안성 시장이나 유기전은 임진란 이후에 번창하였으므로 시대적으로 맞지 않고 통일신라 시대 전후라면 삼남대로가 번창하고 신라의 무역 마차가 당성으로 향하던 시절임으로[김춘추가 당에 가던 시기]칠장사의 일곱 도적은 삼남대로에서 당성을 오고가던 무역 짐바리를 털었다는 얘기이며 칠장사의 도적과 당성무역은 관련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또 어사 박문수는 천안 입장면 사람인데 평택으로 가지 않고 칠장사에 와서 잠을 자고 삼남대로를 따라서 서울을 갔다면 당시까지도 평택은 갯벌이며 통행이 불가능 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천안 입장 사람인 박문수와 공주 정안면[휴게소]사람인 맹사성이 평택 사람인양 날조하려다가 망신을 당했다는 賤言[천언]을 들은바 있다.

 

     여기서 삼남대로를 정의할 필요가 있는데 삼남대로는 통일신라 시절부터 고려, 조선중엽 까지 1,000년 이상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사람들이 함께 다니던 길을 말하며 진천에서 죽주산성까지의 길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

 

     진천 이전은 각자 온 것이고 가령 조령, 새재를 삼남대로라 할 수 없고 영남대로이며 죽주까지 오면 각자 백암, 이천으로 서울을 갈 수 있고, 양지로도 갈 수 있고, 처인성으로 올라와서 용인 쪽으로 갈 수 있고, 병점의 떡전거리로 나와 망포리 쪽이나 반정리 쪽으로 갈 수 있었을 것이고 갈양사[용주사]앞으로 해서 수기, 분천 상리, 내리, 군포, 의왕, 남태령으로 갈 수도 있었으니 어느 길을 삼남대로라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궂이 임진란 이전 이후의 서울 가던 主路[주로]를 말하자면 갈양사[용주사]앞으로 해서 수기, 분천, 내리, 군포, 의왕, 남태령 길을 삼남대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죽주산성

     윤민용 선배의 안내로  안성군 죽산면의 죽주산성에 도착하였다.   이 죽주산성은 처인성, 독산성과 달리 고구려 성이다.   고구려가 한강변의 백제를 몰아내고 충주까지 점령하여  100여 년을 지배하던 장수왕 시절 남진 고구려가 전진기지로 쌓은 성이다.   성안에는 샘물이 있었고 1개 중대병력 정도도 주둔할 수 있는 성이었다.   신라의 무역 마차가 이 성에 들어가기는 힘들듯 하였고 인근에 비석마을이라는 오래된 마을이 있었는데 맹사성이 자고 간  집터도 남아있다는 얘기고 각종 비석이 많아서 비석마을이라면 이 마을이 역자의 사연이 많고 신라의 무역상들도 머물러간 마을이 분명하였다.   진천에서 죽주산성[비석마을]과 의 거리는 40km 내외였다.   날이 어두워 귀향하였다.

 

 

 처인성 답사

 

     2012년 11월 우리는 처인성 답사를 떠났다.   처인성은 고려 승려 김윤후가 몽고장수 살례탑을 활로 쓰러뜨린 전설이 내려오는 고려성으로도 알려졌지만  한강 백제가 쌓은 독산성, 수원 고읍성과 같이 백제 토성이라는 전설이었다.    안성의 죽주산성과는 직선도로가 있었고 통링신라 시대의 당성으로 향하던 무역로가 처인성을 지난 게  분명한 만큼, 처인성은 백제 토성임이 확실해 보였다.

     규모나 형태면에서 죽주산성하고 비슷하였고 야산에 위치했다.   최근에 인근 도로 공사장에서 신라 유물이 다수 발견된 보도는 처인성이 당성 무역로의 거점이었다는 확신을 갖게 했다.

     남사면의 면사무소가  인근에 있었다.  남사면 면사무소 소재지 마을이 2,000년 이상된 마을이라고 샹각하니 감회가 무량하였으며 신라 상인들은 남사면 소재지 마을에 묵었거나 인근에 유물이 출토되는 지점의 사라진마을에서 묵었는지는 모른다.

 

 


2013년 06월 16일

 

화성신문 제 332호[2013년 06월 05일]10면

좌측 상부의 唐恩鋪路[당은포로] 답사기[2]를 복사하여

 

대한민국의 Yacht 항인 경기 화성의 전곡항!.........

그 전곡항 앞에 M-Boat에서


단양의 화통 / 6K2FYL. 신영섭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