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 갓을 벗어 놓은 오산리 미륵불!
돌 갓을 벗어 놓은 오산리 미륵불!
화성시 문화유산 산책 [9]
"기다림은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좋다" 라는 시가 있다. 그렇지만 적어도 귀족들의 횡포와 수탈, 아무리 노력해도 극복할 수 없는 신분의 벽 앞에서 팍팍한 삶을 감내해야만 했던 고려시대 백성들은 절실하게 어떤 한 만남을 기다렸다.
그 만남은 환생할 미륵과의 그것이었다. 그는 앞서갔던 석가모니불이 미처 구도하지 못한 중생들을 용화수 아래에서 환생해 모두 구제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미륵은 석가모니불보다 훨씬전에 성불할 자질을 갖추었음에도 이를 늦추었다고 한다. 그것은 모든 중생을 이 사바세계에서 남김없이 구원하고 나서야 스스로 성불하겠다고 하는 참다운 중생 구도의 의지 때문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미륵은 천상에서뿐 아니라 이 사바세계에 하생해 석가모니불의 뒤를 이어 중생을 직접 구도해 열반의 세계로 이끌기로 돼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륵 보살만 환생해 성불하면 이제껏 당한 것과 같은 고초쯤은 얼마든지 참고 견딜 수가 있었다.
이러한 미륵 신앙은 백성들의 현실적 고통이 클수록 더욱 더 번성했다. 특히나 고려시대에는 환생하는 미륵보살을 위해 향나무를 파 묻는 매향이라고 하는 풍습을 낳고 이를 위한 결계까지 성행했다.
지금도 해안가 마을들에서 매향이라는 지명을 쉽게 볼 수 있다. 또 미륵뜰, 미륵댕이, 미력동 등 미륵과 관계된 이름도 많이 볼 수 있다. 이 미륵관련 지명들을 추적하면 거의 예외없이 그 인근에서 미륵불을 만날 수 있다. 특히 용인 원삼면 미평리, 안성 아양동, 국사봉, 태평 등지의 미륵은 이름난 절들에서 보이는 그런 부처들과는 완연히 다른 생김새를 하고 있다. 그다지 화려하지도 않고 장식성도 뛰어 나지 않다. 그리고 모셔 놓은 곳도 그저 허름한 단칸의 미륵당일 뿐이다.
동탄면 오산리에 있는 미륵도 그렇다. 화강암을 거칠게 다듬어 만든 투박한 조형미를 갖추고 있으며 뒷면에는 나무로 깍아 만든 광배를 꽂았던 네모난 홈이 있을 뿐이다. 주변에는 고려 시대와 조선시대 기와조각이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볼 때 보호각이 있었던 곳으로 보인다.
전체 2M에 가까운 키에 상호[얼굴]가 몸체에 비해 엄청 큰 대두형이다. 게다가 그 옆에는 돌로 만들어진 갓도 떨어져 있다. 인근의 용인과 안성 등에 잘 보존된 동 시기 미륵불들은 이 갓이 머리에 올려져 있다. 갓까지 머리에 올려 졌다면 전체 크기가 2,300mm 가량이 된다.
지금도 이 미륵불 앞에 놓여진 상석 위에는 치성을 위해 가져다 놓은 제물이 있다. 또 가끔은 귀와 어깨 부분에 떡을 올려놓고 치성을 드리기도 한다. 원래 미륵불은 세상의 모든 중생들이 모두 구도되고 나서야 성불하리라던 극도의 구도심에서 발원한 것이지만 오늘날 놓인 치성 제물들은 대부분 피안이 아닌 현세에서의 다복을 기원한 것이리라.
이런 민중의 염원을 가득 담았던 미륵 신앙은 한 때 민중을 현혹하고 수탈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다. 태봉국왕 궁예는 스스로를 미륵이라 칭하고 미륵관심법이라는 허무맹랑한 설법을 전파하며 힘들어하는 민중을 더욱 혼란과 어려움에 빠뜨렸다. 또 조선시대 여환이라는 중은 양주를 중심으로 미륵이 환생해 도성이 함락되면 대궐을 차지한다고 하는 계획을 세웠다가 실패해 모두 참형 당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도 벌어졌다.
지금도 미륵 신앙은 여러 형태로 변모해 미륵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깊은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 어떤 형태든 민중이 아직도 간절히 미륵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왕도 정치든 신권 정치든 또 자유 민주주의든 세상살이 원초적인 삶들에 어려움을 겪는 백성들이 많다는 것을 보여준다.
김충배 경기도 문화재 전문 위원
2012년 04월 28일
김충배 경기도 문화재 전문 위원의 기사
화성신문 제277호[2012년04월23~04월 29일]
8면의 우측 상부를 옮겨 적읍니다.
대한민국의 Yacht항인 경기 화성의 전곡항!............
그 전곡항 앞에 M-Boat에서
단양의 화통 / 6K2FYL. 신영섭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