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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달 최후의 결전지 [충북 단양]

단양의 화통 2010. 10. 5. 15:09

 

온달 최후의 결전

 

     백제의 성왕은 혼신의 힘을 다해 고구려의 한강 하류지역을 공략했다. 이에 고구려군은 한강 상류 지역에 주둔하면서 신라와 대치중에 있던 고구려군의 주력 병력을 빼내어 서울지역의 대 백제 전투에 투입시켰다. 서쪽의 평야 지대가 중하고 동쪽의 산악 지대가 덜 중함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주력이 빠져나간 죽령과 조령의 국경선은 자연히 경계가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 틈을 노린 신라의 진흥왕은 경상도 청년들을 화랑의 정신으로 단단히 무장시켜 한쪽에 칼을 채우고 다른 쪽에는 활 통을 매게 하고 죽령을 넘어 기습하도록 명령했다. 잘 훈련받은 신라의 화랑부대는 험준한 소백의 산들을 단숨에 넘어, 주력이 빠진 무인지경과 같은 고구려의 영토를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갔다.

 

    아무 거칠 것이 없이 전진하는 신라군은 디디는 족족 내 땅이 되니 그들의 진군에는 신바람이 일었다. 하루 오리를 가면 오리가 내 땅이요, 십리를 가면 십리가 내 땅이다. 삽시간에 한강 이북의 10개군에 해당하는 영토가 고구려에서 신라로 넘어가 버렸다. 고구려에서는 땅을 치며 분통해 했으나 백제와 신라의 연합 공세를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으나 어찌하랴!

 

    동맹국의 국왕을 전사시키고 한강 하류 지역마저 빼앗은 신라는 대중국 교류를 갖으며 점차 한반도의 초강국으로 성장해 나갔다. 철천지 원수가 된 백제는 보복을 다짐했으나 좀체로 기회를 가지지 못했고 나날이 시들어만 갔다. 고구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남쪽에서의 공격이 뜸해지자 이번엔 북쪽의 적들이 변방을 소요시켜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빼앗긴 남쪽 땅을 회복해야 한다는 엄두는 아예 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30여년이 지났다. 북쪽 고구려 땅에는 담이 크고 용력이 뛰어난 사내가 하나 생겨나서 전국 사냥대회에 1등을 하여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더니, 이어 후주 무제의 요동 침범이 있을 때는 선봉에 나가 싸움을 벌여 적을 크게 물리쳤다. 전쟁이 끝나고 논공행상을 행할 적에 사내는 왕에게 나가서 큰 소리로 왕에게 고하기를, “신라는 우리 한북의 땅을 갈라 빼앗아 군현으로 만들었으므로 백성들은 원통함에 싸여 아직 부모의 나라를 잊어버리지 않고 있사오니, 원컨대 대왕께서는 신을 어리석고 불초하다 마시고 군사를 내어 주시면 한번 나가 우리의 땅을 회복하겠나이다.” 라고 말했다. 이 말에 대신들은 깜짝 놀라 돌아보니 젊은 장수 온달이 부리부리한 눈을 하고 한 점 흐트러짐이 없이 서서 대왕의 수락을 기다리는 것이 아닌가. 전쟁의 땀내가 절은 군복도 아직 벗지도 않은 채였다. 홀어미를 지극 정성으로 섬기며 밥을 솥 째로 먹고 나뭇짐을 다른 사람의 서너 곱을 졌다는, 한때 장안의 화재가 되었던 바보 온달 그였었다.

 

    사람을 꿰뚫어보는 눈이 있었던 평강공주는 온달이 나라를 구할 동량지재임을 알고 주위의 숱한 모멸을 참아가며 온달의 뒷바라지를 위해 초동의 아낙이 되기로 자처했었다. 산간초막의 무지렁이 집에 며느리이자 아내로 들어가 온갖 고생을 참아가며 밤에는 남편에게 글을 읽히고 낮에는 말 타기와 활쏘기 등 갖은 무예를 수련토록 하여 얼마 안가 호랑이도 무서워하지 않는 고구려의 무사로 온달을 키워냈었다.

 

    대신들은 삼국 중에서 최강국이 된 신라를 이길 수 있을까 하는 반신반의와, 이제 전쟁을 막 끝내고 왔는데 또 싸우러 가자는 주장에 놀라서 입을 다문 채 더는 말을 내지는 않았다.

 

    평원왕은 너무 어려서 내 쫓은 평강공주와 내외의 정을 누리게 하고자 온달의 출정을 만류하고 싶었으나 온달은 도무지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조국 고구려의 딸이기를 자처했던 평강은 사전에 평강과 이야기가 있었고, 그런 까닭에 온달은 사사로운 감정에서 벗어나 장부의 포부를 당당히 개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몇날 며칠의 회의 끝에 평원왕은 대신들의 중론으로 온달의 출정을 결정했다. 온달은 이미 마음속에 계획한 대로 군사를 착출하여 대를 구성했고 기타 제반의 출정 준비를 수주일 내로 완료했다. 준비 완료한 온달은 즉시 어전으로 들어가 출사표를 던졌다. 아내 평강공주와 마지막 밤을 보내면서 낮에 지우들을 모아 놓고 했던 맹세를 다시 한번 아내에게 전했다.

 

   “내 계립현[문경]과 죽령의 서쪽 땅을 우리 땅으로 돌리지 못하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을 것이오.”

 

     그리고 새벽이 오기 전에 말을 타고 휑하니 떠나 버렸다. 평강공주는 대의를 위해 결사의 각오로 떠나는 남편의 뒷모습을 한편으로는 대견해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필부의 아낙으로 부부의 정이 그리워 하염없이 눈물을 훔쳐야 했다.

 

      온달의 각오가 금강석과 같고 또 대국 병사로의 자존심과 대 신라의 원한으로 사무쳐 있으므로 고구려 병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았다. 고구려군은 한때 저들의 땅이었던 신라의 진영으로 깊숙이 쳐들어갔다. 마음 같아선 철통의 요새를 자랑하는 한강 하류 광장에 주둔하고 있는 신라 최정예부대를 공격해 한판 승부를 펼치고 싶었으나, 만일 이번이 잘못되면 또다시 조국 고구려에 군사 충원을 요청하는 등의 국폐를 끼칠 수가 없었기에 비교적 경계가 소홀한 편인 죽령과 조령 관문을 공격하기로 했다. 죽령과 조령 관문이 떨어지면 철통의 요새 공장성도 보급로가 끊기고 말아 스스로 물러서지 않을 수 없게 되리란 판단 때문이었다.

 

      북동쪽 산악 지역은 신라군에 있어서 경계의 최고 핵심 지역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지역의 경계를 맡고 있는 신라 수비대는 진흥왕이 생전에 닦아 놓은 정예군으로서의 위엄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었고, 고구려의 남하에 대비한 철두철미한 작전계획을 수립, 대비 중에 있었다. 그러나 완벽한 요새의 구축이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결사 항쟁하는 북쪽 사내들의 자존심을 막아내기에는 무리가 있었고, 전세는 점점 밀리어 하루에 산 한두 개를 내 놓는 일은 여사가 되었다.

 

     신라 조정에는 변방에서 띄워지는 패전의 급보가 연신 당도하였다. 서라벌에는 언제부턴가 북쪽의 무서운 장수가 날랜 병사들을 이끌고 내려와 신라의 수도를 유린할지 모른다는 소문이 나돌면서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에 신라군이 한강 이남으로 물러섰다는 공식 첩보가 당도하게 되자, 대신들은 대신들대로 왕실은 왕실대로 선대왕이 이루어 놓은 한강 이북의 모든 땅을 일시에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노심초사하게 되었다.

 

     “일개 장수 하나를 어쩌지 못해서 대신라가 이토록 핍박을 받다니 도대체 경들은 낯이 있는 것인가?“

 

     매일 아침 벌어지는 어전회의에서 서슬 퍼런 왕의 불호령에 문무 관료들은 당황한 낯빛으로 서로 얼굴만 마주 본 채 전전긍긍하였다.

 

     을아단[지금의 영춘면]까지 짓쳐 내려간 온달의 군사들은 태화산 자락[영춘면 소재]에 토성을 쌓고 강을 도하하기 위한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강남쪽의 삐죽이 솟은 300고지에는 신라군이 인근 주민들을 동원하여 축성한 석성이 견고하게 자리 잡고 고구려군의 진격을 감시하고 있었다. 큰비가 있었던지라 흐름이 웅장해진 강물[지금의 남한강]은 높은 수위를 유지하며 고구려군의 공세를 일정기간 지연시키는 역할을 했는데, 이는 후퇴하는 신라군이 전열을 가다듬을 수 있는 더 없이 좋은 기회가 되었다.

 

     신라군은 성 아래의 초목을 베고 불을 질러 시야를 확보하는 한편 강가의 돌들을 투석전에 쓸 요량으로 무수히 주워 올렸다. 이 작업에 동원된 인근의 부녀자와 노인, 그리고 아이들은 진종일 가파른 산길을 오르내려야 했다. 신라 조정에서는 전역에 방을 붙여 활 잘 쏘는 자들을 모집하여 전방으로 올려 보냈다.

 

    고구려의 일개 장수인 온달을 잡기 위하여 구성된 궁수부대는 기병의 호위를 받으며 경상도 땅을 넘어서 죽령에 접어들고 있었다.

    강물이 많이 줄었다. 떨어지는 노을 속에 서서 온달은 강 건너 소백의 등성이를 유심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내일 이른 새벽에 강을 건너리라. 그리고 저 신라의 무리들을 산 너머로 쫓아버려 다시는 이 땅에 발을 디디지 못하게 하리라. 신라군으로서도 저들 선대 왕의 공적을 하루아침에 뭉개 트리고 죽령 이남으로 줄행랑을 놓는 치욕을 당하려고 하진 않을 것이다.

    고구려군으로서도 죽령과 조령 관문을 확보하지 않으면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무엇보다 힘든 싸움은 강을 도하하는 일이며, 신라군도 이를 알고 강을 경계로 사생결단을 벌일 것이다. 내일 새벽에 있을 아단성 공략은 사상 유래가 없는 대접전이 될 것이다.

 

    그날 밤은 길었다. 초저녁 어둠이 내릴 적에 상류 지역으로 도하 부대를 출동 시킨 뒤에 뜬 눈으로 밤을 새운 온달장군은 북두칠성이 기울어 인시를 가리킬 무렵에 군사들을 독려하여 아단성 앞 강물을 도하하도록 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고구려군은 일렬로 서서 한길이 넘는 강물을 건넜다. 여울목을 지키는 신라군의 주 감시 지역을 피하기 위해 그들은 일부러 수심이 깊은 곳을 택했던 것이다. 칠흑의 어둠속에 피아의 식별을 어렵게 했음에도 선봉에선 군사가 밀려드는 공포감에 행군의 속도를 자꾸만 지연시켰다.

 

    이를 눈치 챈 온달 장군은 선봉에 서서 직접 군사를 이끌었다. 대열은 순식간에 강의 저편 남쪽으로 옮겨갔다. 뒤늦게 도강을 눈치 챈 신라군이 무작위로 화살을 쏘았지만 대부분 빗나가고 운이 좋은 화살은 미리 준비한 방패에 걸렸다.

 

    초저녁에 영월 쪽 상류를 건너간 선봉부대가 뒤쪽에서 응전을시작하면서 수비하던 신라 군사들은 사방에서 일어나는 고구려군의 진세를 두려워하여 온달군의 도강을 차단하지 못하고 아단성으로 퇴각하였다.

 

    일진일퇴는 오전 내내 계속되었다. 성을 나온 신라군이 중턱까지 치고 내려오면 고구려군은 산 밑에까지 쫓겨 가고, 다시 고구려 군이 사력을 다해 산 중턱을 치고 가면, 신라군은 성 가까이로 퇴각했다. 소모전이 계속되면서 온달은 차츰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 성을 치고 나면 바로 죽령이다. 죽령으로 적을 패퇴시켜 구국의 맹세를 지킬 수만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온달은 참모의 만류를 뿌리치고 앞으로 달려 나와 손수 진두지휘를 하였다. 이에 군사들은 사기가 앙양되어 단숨에 성을 깰 양으로 지쳐 올라가기 시작했다. 기름에 불이 붙어 오르는 양으로 고구려 군사들의 대열은 산을 타고 피어올랐다. 화살이 날고 돌이 구르는 아비규환의 지옥 속에서 점점 승기를 잡아 가는 것은 고구려군이었다.

 

     이런 와중에도 고요히 성을 빠져나와 산 아래가 훤히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는 무리가 있었다. 간밤에 죽령을 넘어온 궁수부대원들이다. 이들은 백보 밖의 솔방울을 맞춰내는 신기를 가진 자들로 구성된 특수부대였다. 생과 사의 혼란 속에서도 그들은 동요하지 않고 산 아래의 정황을 살폈다. 침묵을 지키던 그들이 조용히 활에 살을 메긴 것은 그들 중에 누군가 좌충우돌하는 온달을 가리켜 손짓을 한 때였다. 시위가 당겨지고 일시에 살이 하늘을 메웠다. 슝슝슝슝.

 

     동분서주 싸움을 독려하던 온달이 일시에 튕겨지는 활시위의 울림을 들은 건 살이 공중에서 자신을 향해 방향을 틀 무렵이었다.

 

    “장군!“

    수하 비장의 놀란 함성이 귓전을 스치고 지나감과 동시에 온달은 말 뒤에 몸을 숨겼다.   무수한 살들이 말의 몸통에 꽂혔다. 주저앉은 말 뒤로 온달의 몸이 다시 돌출되고 그 위로 다시 살이 쏟아져 내렸다. 칼을 휘둘렀으나 모든 살을 받아낼 수는 없었다. 촉이 크고 예리한 살이 하나 온달의 갑옷을 뚫고 살을 가르며 뼛속 깊이 박혀들었다.

 

     순간 온달은 극심한 분노를 느꼈다. 그것은 자신의 몸이 다시 재기할 수 없음을 본능적으로 느꼈을 때 오는 한계성의 자각 같은데서 오는 분노였다. 온달은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과업을 이루지 못한다는 안타까운 분노와 함께 두고 온 고향 산천과 평강공주의 얼굴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이대로...... 죽을........공주!”

 

     누구도 듣지 못하는 실낱처럼 가냘픈 소리가 그의 입술에서 새어 나왔다. 사방 구멍에서 피가 솟고 사지에서 기운이 풀려 나가면서 온달은 땅바닥으로 나 뒹굴었다.

 

     온달이 죽었다는 낭보가 신라 군사들의 입에서 입으로 노래하듯이 퍼져 나갔다. 싸움의 승기는 순식간에 역전이 되고, 고구려군의 대열은 비가온 뒤 불이 꺼지듯 산 아래로 스러져 내려갔다. 후열에 있던 온달의 친위대가 달려 나와 죽기 살기로 신라군의 전진을 살과 창으로, 다시 칼로 그리고 온몸으로 받아냈다. 이 틈을 타 고구려군의 주력은 아직 뜨거운 피가 식지 않은 온달의 시신을 둘러메고 강여울을 건너 태화성으로 퇴각했다. 도강의 시간을 벌어야 했던 선봉의 친위대들은 최후의 한 명까지 남아 혈전을 치러냈고, 승기를 잡고 짓쳐오던 신라군은 악귀 같은 그들의 모습에 그만 간담이 서늘해져서 더는 다가서지 못하고 멀리서 활만 쏘았다.

 

     군사들은 장군의 관을 북쪽으로 옮겨가려고 했으나 온달의 혼귀는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 억울하여 을아단을 떠나지 않으려했다. 군사들은 할 수 없이 고구려의 서울로 전갈을 띄웠고 급히 내려온 평강공주는 온달의 시신 앞에 오열한 후 말하기를,

 

    “생사의 길이 이미 정해졌으니 돌아가사이다.” 하여 그제야 관이 땅에서 떨어졌다.

     고구려군은 이후 몇 번의 작은 싸움에서 신라군의 반격을 받아 냈으나 오래 지속하지는 못했다.

 

     장수를 잃은 병사들은 점차 사기가 가라앉았고 이후 북으로 퇴각해야 했다. 북쪽 사내들은 다시는 을아단의 땅을 밟지 못했다.

 

     온달의 죽음을 끝으로 고구려는 재기하지 못했고 국운은 점차로 쇠해 갔다.

 

     충북 단양군 영춘면에서 군간을 돌아 사지원을 거쳐 영월군 연당리로 빠지는 길이 있다. 지도를 살펴보니 이 길이 영춘면에서 북쪽으로 빠지는 가장 빠른 길이다. 이 길은 그간 세상에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아니했다. 또 오지인데다 최근에 확 포장이 완료되어 여지까지도 세상의 발길이 흔하지 않다.

 

     이 길가에 전해져 오는 돌무더기가 최근 고구려식 적석총[무덤추정]이라는 주장이 있어 학계의 관심이 되고 있다. 다소 훼손은 되었지만 전반적인 모양이 여직 남아있다. 상식적으로 봐도 궁벽한 시골에 이런 규모의 고구려식 무덤이 존재할 까닭이 없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이것이 온달의 무덤이 아닐까 추정하는데, 글쎄 결과는 좀 더 두고 봐야겠다.

 

 

푸르른 고장, 다시 보고픈 청산

 

단양의 향기 찾아

 

재판 1쇄 2001년 03월 01일

정은 문화사 발행

Page 286 중단에서 294까지


2010년 09월 27일


의정부 집에서

단양의 화통 / 6K2FYL. 신영섭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