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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원의 유래!

단양의 화통 2012. 11. 13. 11:11

 

 

퇴계원의 유래[退溪院의 由來]

        퇴계원은 현재의 남양주군 별내면 퇴계원리를 말한다.

[구 : 시군의 명칭으로 명기합니다]

      태조 이성계[太祖 李 成桂]가 태종 이 방원에 의한 왕자의 난을 격은 후에 왕위를 물려주고 함흥에서 은거하게 되자 태종은 조정의 중신들을 함흥으로 보내면서 태조의 환궁을 강력히 종용하게 된다. 

     이에 태조는 몇 차례의 “함흥차사” 이후 한양[漢陽]으로 환궁하는데  한양까지의 환궁을 거부하고 의정부를 거쳐 현재의 남양주군 진접면 내각리 즉, 남양주의 영현[領縣]이었던 풍양현에 풍양궁을 짓고 거처하게 된다.

      태조를 한양으로 환궁시킬 작정으로 남재[南在] 등을 시켜 태조와 더불어 매 사냥을 하게 되는데 남재와 매 사냥꾼을 따라 무의식중에 퇴계원까지 와서 보니 삼각산이 보이는지라 태조는 남재의 꾐에 빠진 것을 알고 내각리로 물러가 궁궐을 짓고 살았다고 하여 퇴조원[退朝院]이라 하였다는 설이 있는데 후에 퇴계원이라 고쳐 불렸다고 한다.

 

참고로 풍양현의 현감 터[자리]는 현재 교회가 자리하고 있음을 첨언합니다.

참조 문헌 ; 京畿北部 名勝•古蹟•觀光 
                1989년 10월 10월 인쇄 및 발행. 
                발행소 ; 京畿北部 商工會議所 
                의정부시 의정부 3동 371[구 ; 주소] 
                전화 42-5811~5[구 ; 전화 번호] 
                인쇄처 ; 太光 印刷所 
                서울 중구 인현동 1가 69-5[구 ; 주소] 
                전화 ; 274-2849[구 ; 전화 번호]
                Page 27에서

 

2009년 10월09일  
신영섭 의정부 집에서 옮겨 적음.

 

 

 

 

왕숙천[王宿川]과

 

 

퇴계원[退溪院]의 유래

    

 

  

왕숙천[王宿川]

 

 

      조선 태조 이성계가 상왕[上王[으로 있을 때 팔야리[八夜里]에서 8일을 머물렀다. 여덟 밤이 되었으므로 “아, 여덟 밤이로구나.” 하여 “여덟 밤이” 팔야리[八夜里]라는 설과  8일을 머물렀다고 해서 팔야리와 함께“왕숙천[王宿川]”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태조 이성계는 묘자리를 알아보려고 와서 잠시 물고기를 낚았다.  이방원이 찾아오자  “퉤” 하고는 그곳에서 꿈쩍도 않고 잠을 잤다.  “왕이 잠든 곳”  이라는 뜻을 품고 그 밖에 세조를 광릉에 안장한 후  “선왕[先王]이 길이 잠들다” 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길이 37.34km, 유역면적 270.79㎢이다. 포천시 내촌면[內村面] 신팔리[薪八里] 수원산 계곡에서 발원하여 남서쪽으로 흘러 남양주시를 지나 구리시에서 한강으로 흘러든다.  유역의 90% 이상이 고도 400m 이하 부분이며,  경사별로 보면 10° 이하의 완사면이 40% 이상이다. 

     양수리에서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류한 한강은 계속 북서 방향으로 흐르면서 왕숙천[王宿川] 중랑천[中浪川] 안양천[安養川] 등의  소지류를 합류해 김포평야를 지나 황해에 이른다.

 

유역에는 광릉(光陵)·광릉수목원·밤섬유원지·동구릉(東九陵) 등의 사적 및 관광지가 있다.

 

 

퇴계원([退溪院]

 

     조선 태조 이성계가 함흥에서 환궁하던 중에 이곳 냇가에 이르러 삼각산의 세 봉우리를 보자 분이 복바쳐 다시 풍양궁으로 물러가 있었으므로  '퇴조원' 이라 하다가  '퇴계원' 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태조께서 함흥에서 환궁할 때 남재와 매 사냥꾼을 따라 무의식중에 이곳 퇴계원까지 와서 보니 삼각산[북한산]이 보여 “아차 내가 남재의 꾐에 속았구나” 하고 길을 돌이켜 내각리[내곡리]로 물러가 궁궐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조정이 물러갔다 하여 퇴조원[退朝院]이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한편 태조가 도성 바깥 풍양궁[豊壤宮]에 머무르니 조정의 신하들이 아침마다 태상왕에게 조례를 올리고 정사를 문의하려 했지만 얼씬도 못하게 해서 신하들은 서남쪽으로 몇 십리 떨어진 퇴계원 밖에서 풍양궁 쪽을 향해 절만하고 물러갔다 하여 퇴조원이라는 설도 있다.

     그런데 그 후 인근 내곡리[내각리]에 연안 이씨 월사 이연구의 후손에 조온이란 자가 있었는데 일반 상민들이 “퇴조원” 의 지명을 부르는 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아 조온의 아들이 퇴계원[退溪院]으로 고쳐 부르게 하였다고 전한다.


      또한 예종[睿宗]이 선왕인 세조[世祖]의 능인 광릉[光陵]에 참배 차 행차하는데 교통이 불편하여 길을 새로 만드는데, 냇가를 길로 닦기 위하여 밖으로 물리쳤기 때문에 퇴계원이라 부르기 시작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다른 유래는 본래 양주군 별비면 지역으로 도제원이 있었기 때문에  '도제원'  또는  '토원' 이라 부르던 것이 변하여,  '퇴조원'  또는  '퇴계원' 이 되었다고 전한다.

 

     필자의 해설은 조선의 문신이자 학자인 이황(李滉) 의 호 퇴계(退溪) 와 지금의 퇴계의 한자가 일치할 뿐만 아니라 관련성이 있지 않을까 역사를 더듬고 있다. 조정 안팍의 당파 싸움을 보며 숙고한 그는 왕숙천을 따라 내려오다 지금의 퇴계원면에 이르렀다. 

     왕숙천 모래밭에서 정신을 집중하여 ‘퇴계[退溪]’ 를 그린다.  이황은 낙향을 결심 하였다. 자리를 뜨자마자 그 신비로운 글씨 까마귀 떼 바람이 몰고 갔다.

 

     이황은 퇴계, 문순공 이황, 이퇴계, 퇴계 이황으로 불렀다.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퇴거계상; 退居溪上 의 줄임말]도수, 퇴도[退陶]도수[陶叟] 본관은 진보[眞寶]이며,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퇴계라는 호는 이황 고향인 안동 토계리[兎溪里] 시내인 토계[兎溪]에서 따와 퇴계라고 했다는 말도 있지만, 퇴거계상에서 나왔다는 말이 맞을 듯하다.


선조 8권, 7년(1574 갑술 / 명 만력(萬曆) 2년) 7월 16일(무자) 1번째 기사

 

     응교 정탁이 서면으로 퇴계·한훤·일두 등의 시호가 합당한지 묻다. 

응교 정탁[鄭琢]이 서면[書面]으로 퇴계[退溪]한훤[寒暄]일두[一蠹] 세 선생 및 상신[相臣] 안당[安瑭]이명[李蓂]의 의정[擬定]한 시호[諡號]에 대해 합당한지 여부를 물으므로,

 

유희춘이 답하였다.

     “세 선생의 시호를 의정[擬定]한 것은 이의할 것이 없읍니다.  그러나 이명은 무신년[553] 에 포학한 기세가 극도에 달했을 때에 당로자[當路者]【이기(李芑)의 잔인한 행동을 탄핵하여 인신[人神]의 분을 씻어 주었었으니, 직도불요[直道不撓]의 정[貞]자로 해야 마땅할 줄 압니다.”


     이황[李滉, 1501년 음력 11월 25일~1570년 음력 12월 8일]은 조선 명종·선조 시대의 문신, 정치인, 성리 학자이며 시인이다.  정치보다는 학자 지향형 인물이다.  과거 급제 후 승문원부정자로 관직에 발을 들여놓았으나 사화[士禍]와 훈구파 내부의 정쟁으로 혼란스러워지자 관직을 사퇴한다.  풍기군수 재직 시절 서원들을 지원하였으며, 임금 명종의 친필 사액[賜額]을 받아 백운동 서원을 소수서원으로 만듦으로써 사액 서원의 모범 선례가 되었고, 사림파의 세력이 확장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다.  소고 박승임,  서애 류성룡 등의 문하생을 배출했는데, 후일 동인이 분당된 뒤 박승임의 제자는 남인 일부와 북인 일부로, 류성룡과 그의 후예들은 남인으로 이어진다.

 

Never의 SSSEOULSS님 블로그에서

복사하여

 

2014년 04월 03일

 

청평 강가에서

봄비 내리는 날!

 

단양의 화통 / 6K2FYL.  신영섭 올림.